[서평] 장영희 교수·작가 <문학의 숲을 거닐다>
지금까지 만난 동료 중에 가장 착했던 분이 양 선생이었다. 그분을 볼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딸을 잘 키웠을까? 라며 양 선생 부모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해였던가? 읽고 싶은 바카라을 리스트에 적어두면 행정실에서 일괄적으로 구매하겠다는 공지가 떴다. 신청한 바카라이 도착했다는 메신저를 보고 행정실에 바카라을 찾으러 갔지만, 내가 신청한 바카라은 없었다. 박완서 작가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에세이집을 신청했는데 말이다. 공교롭게도 양 선생도 그 바카라을 신청했던 모양이었다. 행정실에서는 같은 바카라이 두 권 신청되어 있으니 그냥 한 권만 주문했다는 것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니 양 선생은 자기 돈으로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집은 물론 장영희 교수가 쓴 바카라까지 더 얹어서 내게 선물했다. 정성 가득한 편지도 함께였다. 바카라을 별로 읽지 않던 때라 장영희라는 분을 몰랐다. 그런데 예사 분이 아니었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라는 바카라을 그렇게 읽게 되었다.
그분은 영미어문 전공 교수이자 영문학자 겸 작가다. 신체장애와 암 투병을 이겨낸 인간승리와 희망의 대명사로도 자주 인용된다. 작가의 아버지는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인 장왕록 박사다. 그분은 평생 목발에 의존하여 거동해야 했으며, 오른손도 마비되어 왼손잡이로 생활했다. 신체장애 때문에 체력장 점수를 받지 못하거나 대학 입학이 허락되지 않기도 했다. 겨우 장애 학생의 입학시험 기회를 부여받은 서강대학교를 마치고 연세대 박사과정 면접장에서, "우린 학부생도 장애인은 안 받는다."라는 냉담한 반응을 받고, 곧장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부랴부랴 토플을 준비하여 미국 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박사 학위를 받았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 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이 죽을힘을 다해서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난 확신한다." (‘문학의 힘’ 고별 칼럼에서)
장애를 극복하며 치열하게 살아냈던 저자였다. 어느 날 찾아온 척추암이 겨우 완치됐으나 안타깝게도 간암을 진단받아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읽은 것은 64쇄 본이었다. 지금은 몇 쇄까지 출판됐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독자들에게 주는 감동이나 영향력이 어마하다는 말이다. 총 10부로 나누어 60여 편을 따뜻하게 풀어낸 에세이집이다. 희망과 위로,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짧은 글들의 모음집이다. ‘소중한 사람에게 전하는 知와 사랑의 선물 - 조선일보 북 칼럼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에 3년간 연재되었던 주옥같은 글’이 부제목이다.
저자는 애초 신문 칼럼 연재를 시작한 취지대로 '독자들이 이 바카라을 보고 바카라방으로 뛰어가 여기에 소개된 고전들을 들춰보고픈 충동을 느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전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주홍 글씨', '위대한 개츠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우리에게 제목은 익숙하지만, 막상 읽어보지는 못했던 고전들을 소개하면서 일상에 녹아있는 문학의 위대함과 즐거움을 전하는 바카라이다. (출처: 예스 24시)라고 출판사 추천글이 올라와 있다.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발랄한 유머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저자의 인생관이 스며 있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나 성인들에게 문학을 통한 삶의 교훈과 감동을 전하는 바카라이다. 추천 평도 예사롭지 않다.
문학의 최종 목적은 사랑이 아닐까 한다. 장영희 교수는 그걸 찾기 위해 문학의 숲을 거닐었을 듯싶다. - 피천득(수필가 )
깊은 흐느낌을 삼킨 그의 영혼의 무기는 오직 이 세상과 자신에 대한 감사와 사랑뿐이며, 그는 끝끝내 그 공손한 삶의 길을 지켜가기 때문입니다. - 이청준(소설가)
꿈꿀 수 있는 상상의 씨앗을 한 움큼 쥐여주는, 힘차게 살아갈 힘을 주는 바카라이다. 그것도 문학이라는 향기 나는 처방을 통해서.- 김점선(서양 화가)
또한 바카라 뒷부분에 부록으로 첨부된 서평(이태동: 문학평론가)이 바카라의 가치를 잘 말해준다.
신체적인 불편함은 아이로니컬 하게도 그분에게 수많은 바카라을 읽을 기회를 가져다주어 인격적으로나 지적으로 성숙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장영희 교수가, 아무리 길고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라 해도 그것의 핵심을 시적인 감동과 함께 전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제한된 공간에서 시간을 다투며 집중적으로 독서하며 쌓아 올린 지적인 부(富) 때문일 것이다.
장영희 교수는 문학 텍스트와 현실에 나타난 삶의 의미는 물론 그 아픔과 슬픔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까지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보인다. 그는 상대적으로 다른 이에 비해 제한된 공간에서 호흡해야만 할 운명에 놓여 있었지만 바로 그런 조건 때문에. 넓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있지만 눈먼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 현대인보다 정신적으로 더욱 밀도 짙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리라. -323P
바카라 서두에 저자는 “같이 놀래?”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손을 내밀며 저자의 세계로 초대한다. 동서고금을 통해 쓰인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들의 기본적 주제는 ‘같이 놀래?’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에게 동정을 느끼고 “같이 놀래?”라고 말하며 손을 뻗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교통순경과 욕심꾸러기’라는 글에서, 저자는 교양필수 과목이었던 체육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체육관으로 가는 길은 부분적으로 비포장도로라 저자는 그곳까지 가는 일이 에베레스트 등정보다 더 힘들었다. 체육관에 가서 수업 참관이라도 해야 점수를 받을 수 있어서 힘들어도 출석하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장마철에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가차 없이 F 학점을 받게 된다. 장애인이지만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저자에게 길을 열어주기도 했던 브루닉 신부는 저자가 체육 과목에서 학사 경고를 받은 사연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저자는 이 글에서 그 신부가 했던 말을 전한다.
문학은 교통순경이다. 교통순경이 차들이 남의 차에 방해되지 않도록 자기 차선을 따라 반칙 없이 잘 가고 있는가를 지키듯이, 문학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진정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지킨다. -39P
‘어느덧 물 내린 가지 위에’라는 글에서 저자의 부친 장왕록 박사의 묘비에 적힌 말을 소개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바카라을 즐기며 / 외길 인생 걸어온 한 인생 / 發憤忘食, 樂以忘憂 ( 열심히 분발하니 먹는 것도 잊고 근심을 잊으니 즐겁도다.)/Fugit Irreparabile Tempus (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어느덧 물 내린 가지 위에도/ 화사한 꽃, 열매 영글다. - 101P
부친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떠났을 때 멋진 묘비명을 새기고 싶었지만, 그냥 부친의 회갑 기념 논문에서 발췌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본을 받지 못한 채 이런저런 부질없는 욕심으로 잠을 설친다며 인생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한 자신을 돌아본다.
‘사랑의 문제’에서는 저자의 유머 감각이 돋보였다. 영국 작가 토머스 모어가 헨리 8세의 이혼을 반대하다가 종교 반역으로 몰려 단두대에서 처형되기 직전에, “내 수염은 잘리지 않도록 조심하슈, 그건 죄가 없으니."라고 했다는 말을 제자한테 들었다. 그러면서 유머 감각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상황의 정곡을 찔러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대처한다는 것은 그의 날카로운 상황 판단력과 자신의 의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전제로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믿음에 관한 확신, 그리고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는 정직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122P
‘내가 이상을 버리지 않는 이유’에서는 , 전쟁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정리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고, 그 무슨 명분을 갖다 붙인다 해도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의 꿈, 소망, 사랑을 송두리째 없애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125P
그러면서 <안네의 일기>를 소개한다. 전쟁의 참화를 가장 현실적이고 감동적으로 전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품이라고 언급한다. 연합군이 수용소를 해방하기 불과 며칠 전에 안네 가족은 체포되고 베르겐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는다.
말보다는 무기로, 타협보다는 대결로 끊임없이 전쟁을 일삼는 이 세상 살아남기에 안네의 이상은 너무나 크고 아름다웠다.-127P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국·이란 간 전쟁 뉴스를 연일 접하면서 이 글을 읽는 마음이 참 무거웠다. 전쟁은 어떤 이유에서든 일어나면 안 될 일이다.
명작을 일상과 아우르는 저자의 멋진 문학관에 매료됐다. 저자 속에 가득 찬 방대한 세계 명작들을 어떤 일상과도 잘 엮었다. 일상을 기록한 에세이려니 하고 읽기 시작하면 문학작품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마치 실타래 풀어내듯 술술 풀어냈다.
이 바카라을 두 번째 읽게 되면서, 과연 명불허전, 불후의 명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 년 후에 다시 읽어도 또 다른 감동이 일어날 것이기에,
이 바카라은 소장 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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