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자꾸 나를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 <더 레슬러>

by레빗구미
ChatGPT Image 2026년 7월 9일 오후 05_12_29.png


영화 <더 레슬러>를 보고 가장 이상했던 건, 랜디가 실패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한때 수많은 환호를 받던 프로레슬러였지만, 지금은 몸도 망가졌고 돈도 없다. 슈퍼마켓에서 일하고, 작은 경기장을 전전하며 하루를 버틴다. 딸과의 관계도 엉망이다. 누가 봐도 그의 인생은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축 쳐진 어깨만 봐도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버텨왔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끝내 그를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끝까지 다른 사람에게 따뜻했기 때문일 것이다. 팬들에게는 웃으며 사인을 해주고, 마트 손님에게도 먼저 농담을 건네고, 자신을 미워하는 딸에게조차 다시 다가가려 한다. 자신의 삶은 엉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만큼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다. 그렇게 따뜻한 사람이 실패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나 자신을 실패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까.


꽤 오래전부터 나는 나를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스스로 그렇게 믿었다. 10대 시절엔 모든게 너무 조심스러웠다. 내가 하는 모든게 부끄러웠다. 함부로 나서지 못했고, 그저 조용히 이름 없는 학생으로 남았다. 아주 가까운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고, 그렇지 않으면 집으로 와서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저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을 실패라고 이름 붙였다.


20대가 되고서 가장 처음 날 맞은 건, '혼란'이었다. 처음 대학교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한 날. 먼 곳에서 잠을 자며 낯선 사람들과 보내야했던 기억들. 선배가 내 이름을 부르자 주섬주섬 앞으로 나갔다. 그렇게 조용한 소리로 나 자신을 소개했다. 10대에 만났던 세계에서 벗어나 좀 더 확장된 우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뭘해야할지 몰랐던 그 시간, 다채로운 무지개인듯 했지만 나에겐 회색빛이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이 뿜어내는 다채로운 빛이, 나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그저 회색빛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그저 혼란과 부끄러움 속에서 그 시간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뭘해야할지, 어떤게 맞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시간들이었다. 그저 춘천의 골목길을 걸어다녔고, 배고프면 자취방에 들어와 라면을 끓여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30대에 들어와서는 회사가 또 다른 링이었다. 야근은 일상이었고, 인정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열심히 해도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고, 어떤 상사는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 나는 조금씩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레빗구미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ISFJ - 영화에 대한 리뷰보다는 영화안에 담긴 감정들에 대해 씁니다. 영화의 긍정적인 부분을 전달하려 합니다. 세계최초 영화 감정 리뷰.

1,275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08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