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사람도, 모두 다 변한다
동화 속 주인공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어쩌면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내 삶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뼈대라도 남아 있다면 다시 세워볼 텐데,
그마저도 남지 않고 전부 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 후로 한동안 나는 나를 지치게 만드는 데 몰두했다.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움직였다.
몸이 아프면 마음은 조금 덜 아플 거라고 착각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온라인 게임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가장 아팠다.
그는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모든 것을 잃은 채 제자리에 남겨진 기분이었다.
축하한다는 말보다 먼저
‘나는 뭐 하고 있지.’
그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놓았던 테니스를 다시 시작했다.
날아오는 공을 보고,
자세를 잡고,
다시 공을 넘기는 일.
그 단순한 반복이 좋았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지금 날아오는 공 하나만 보면 됐다.
내가 유일하게
내 감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연습을 미뤘고
오랜만에 다시 테니스장을 찾았다.
마스크를 쓰고 운동하는 내가 신기했던 건지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복싱부터 골프까지 여러 운동을 해봤지만
결국 테니스의 매력에 빠졌다는 이야기였다.
온라인 게임에서 임원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 익숙해서였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러다 자주 간다는 식당의 젊은 사장님 이야기가 나왔고
그 사장님이 결혼했는지를 묻더니 대뜸 나와 이어주려는 언행에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어진 이야기가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자녀가 대학생 정도 되면 분가해서 각자의 삶을 사는 부부도 많다는 이야기.
결혼생활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관계를 계속 이어갈 것인지 다시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자신 역시 온라인 게임과 거리가 있는 원룸에서 따로 생활하고 있는데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는 말까지.
그 말을 듣는데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언젠가 많은 사람 앞에서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약속했을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구나.
그 순간 오래전 들었던 이야기가 하나 떠올랐다.
과거 그는 성별이 다른 온라인 게임 동료들과
러닝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종종 어울렸다.
그중 누군가는
“아이들 때문에 같이 사는 거지. 나중에는 졸혼하고 싶다.”
그런 말을 한다고 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 그는 그 말을 어떤 마음으로 들었을까.
동조했을까.
혹시 그들 사이에 내가 모르는 감정이 있었을까.
생각은 얼마든지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정말 다른 감정이 싹텄는지,
그것이 우리의 끝에 영향을 미쳤는지,
끝까지 파헤쳐 정답을 알아낸다고 해서
지나간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확인사살을 한들 결국 내 마음에 상처 하나를 더 내는 것뿐이다.
모르는 채로 끝내는 것도
때로는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물론 몸과 마음은 여전히 따로 논다.
괜찮은 줄 알았다가 갑자기 슬프고,
화가 났다가 외롭고,
아무렇지 않다가도 어떤 말 한마디에 오래전 기억이 튀어나온다.
그래도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그 감정들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행복했던 하루,
실컷 웃었던 순간,
새롭게 기대되는 일들을 하나씩 넣어본다.
생각해 보면 마지막의 우리는
배터리가 수명을 다해가던 휴대폰 같았다.
충전해도 금세 꺼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리 충전기를 꽂아도 켜지지 않는 휴대폰.
나는 그 휴대폰의 주인이면서도
배터리가 오래전부터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내 잘못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도
그저 꺼져가는 모습을 바라본 사람에게도 잘못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은 그의 행복과 안녕을 빌어주지 못한다.
좋았던 사람이었으니 행복하길 바라야 한다는 말도,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니 잘되길 빌어줘야 한다는 말도
지금의 나에게는 조금 버겁다.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서두르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지나면
미움도 원망도 결국 지금보다 옅어질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오래전 만났던 X와 업무적인 대화를 나누게 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그가 불쑥 오래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미안했다고 말했다.
잊고 있던 장면 하나가 돌아왔다.
내 생일이었다.
그에게서는 하루 종일 연락 한 통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잘 잤어?”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고
홧김에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네가 한 말이니까 지켜.”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는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코인으로 재산 대부분을 잃었고
그런 상황에서 결혼까지 생각하려니 모든 것이 버거웠다고.
그리고 미안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화가 나지도 않았고
속이 시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 가지가 궁금했다.
내가 이 사람을 왜 그렇게 좋아했더라.
그리고 조금 뒤에는
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왜 헤어졌더라.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 없는 하루를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토록 선명했던 감정의 이유조차 희미해져 있었다.
그 순간 조금 안심이 됐다.
사람은 정말 잊는구나.
아니,
정확히는 잊는다기보다
더 이상 아프지 않은 방식으로 기억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마음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마음 어딘가가 저리고
좋은 소식을 들으면 괜히 내가 뒤처진 것 같고
문득문득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답을 찾고 싶어 지지만,
어느 날에는 나도
‘내가 왜 그렇게 아팠더라.’
하고 생각하는 날이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견딜 만해졌다.
좋은 것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결국 넘치고 만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가진 그릇의 크기를 알기 위해
삶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고도 했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그 시간을 지나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랑도 변한다.
사람도 변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마음도 변하고,
죽을 만큼 아팠던 기억조차 변한다.
그리고 다행히,
나도 변한다.
한때는 그 사람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던 내가
이제는 혼자서도 하루를 채우고, 무너졌다고 생각했던 삶 위에
조금씩 새로운 것들을 올려놓고 있다.
그러니 지금 내리는 비가 언제 그칠지는 몰라도
끝나지 않을 거라고 단정 짓지는 않기로 했다.
무지개가 뜨기 전에는
한바탕 폭우가 쏟아지기도 한다니까.
이번에는 나를 조금 믿어보기로 한다.
예전의 사랑도 지나왔듯이
지금의 사랑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는 정말 아팠는데.
그래도 결국, 지나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