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회사가 조직 개편에 들어갔었다. 그 과정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사업부 A와 B가 합쳐졌는데, 그러면서 필연적으로 그 아래 있던 산하 조직들도 통폐합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처음 시작은 A와 B의 수장들의 물갈이였고, 그 뒤에는 부서별로 하나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업 규모로 따지면 A가 훨씬 컸기 때문에 대부분의 변화는 A가 B를 흡수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안 그래도 물줄기를 잘 타고 있던 내 상사는 이번 사업부 합병으로 한번 더 위로 올라갔고 말이다.
A에 속한 입장으로서 B에도 내 부서와 같은 조직 B1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내 쪽에도 변화가 생길 거라고는 미리 짐작했지만, 그렇다고 막 걱정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게, A와 B의 규모 차이가 있는 만큼 내가 이끌고 있는 A1 역시 S가 수장으로 있는 B1 보다 3배 정도로 규모나 예산액에서 차이가 났고, 내 쪽의 실적 역시 B1보다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다. 내 팀은 성과 달성율에 비례해 높은 보너스를 받고 있었고, 자랑 같겠지만 나 역시 개인적으로 추가 보너스를 받을 정도로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거기다 최근 B1에서 핵심 인재를 놓치는 바람에 내 팀에서 그쪽 업무 지원까지 했기 때문에 나는 좀 안심하고 있었다.
B1의 수장인 S는 이 회사에서 15년 이상 몸담은 고인물이었는데, 원래 영업부 (Sales)에서 10년 이상 일하다가 내가 스카우트되기 전에 데이터 부분 관련인 B1을 새로 맡게 되었다고 했다. 즉, 요약하자면 S와 내가 B1, A1 수장이 된 기간은 비슷했지만, S는 영업 출신, 나는 이 부분 경력직, 그는 회사의 고인물, 나는 (그에 비하면) 회사의 뉴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들로 이번에 내 상사가 내 팀과 B1의 합병에 관해 말을 꺼냈을 때 올게 왔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별다른 걱정 없이 대화에 임할 수 있었다.
내 상사는 내 팀의 성과와 업무 달성율에 대한 칭찬을 시작으로, 팀 운영을 잘하고 있다며 내 노력을 치하해 주고, 격려하는 통상적인 말들로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두 사업부가 합쳐졌으니 보다 일관적인 팀 운영과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너와 S의 팀도 합치는 게 좋을 것 같다. 네가 팀을 잘 운영하고 있으니 B1 팀도 맡는 게 나을 것 같다."
여기까지는 나도 예상하고 있었던 거니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듣고 있었는데,
"and you report to S"
여기서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Why?"
뭐라 생각할 틈도 없이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왜? 왜 내가 B1 팀까지 맡는데 S는 내 새로운 상사가 되는 거지??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Because you are good at your job"
????
이게 뭔 멍멍이 소리야? 내가 일을 잘하는데 왜 S가 내 상사가 돼?
그래서 물었다.
"Are you pushing me out?"
지금 날 내쫓으려고 초석 쌓는 거냐고.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내가 A1와 B1을 다 바카라임지는데, S는 나만 관리하면 된다니 말이다. 직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나를 당장 내쫓을 수는 없으니까, 일단 날 중간 관리자로 앉혀두고 S가 날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나한테서 A1의 일을 배웠을 때 나를 잘라내겠다는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그건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러며 덧붙였다.
"S can't do what you do"
????
걔는 나만큼 못하는 데 왜 걔가 내 상사야? 도대체 S가 뭐길래?? 그래서 또 물어봤다.
"Then what does he have that I don't?"
그럼 걔에 비해서 내가 못하는 건 뭔데?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S는 회사에 오래 있었던 만큼 노하우가 있고, 영업 쪽 기질이 강한 사람이라 너에게도 좋은 파트너가 될 거다, 등등.
도저히 와닿지도 않는 그 설명을 듣고 있자니 단전에서부터 내공 대신 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험한 욕* 지금 나보고 재주 부리는 곰이 되라는 소리 아냐. 대신 돈 버는 놈은 S가 되는 거고.
그래서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Why can't I be the new lead?"
S 따위 때려치우고 왜 내가 새로운 수장이 될 수 없는 거냐고. 그러자 하는 소리가 뭔 줄 아는가?
"너는 지금 팀으로 충분히 성과를 내고 있으니까, B1팀을 맡는 게 네게도 좋은 새로운 도전이 될 거다. 대신 S가 사업 전략이나 로드맵 같은 부분은 도맡을 테니 너도 업무량이 줄어 좋은 거 아니냐? 대신 S는 영업 쪽 특성을 잘 살려서 대외적으로 이 팀의 이름을 알리는 데 힘쓸 테니, 이건 네게도 S에게도 좋은 결정이다."
.... '너 지금 나 가스라이팅하냐?'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대신 그녀의 말을 들으며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녀의 독재적인 팀 운영 방식이나 독단적인 결정에 반기를 들었던 일. 프로젝트 진행하는데 그녀가 대뜸 상대편 수장과 밥 한 끼 먹고 타협한 거라며 원래 진행도와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해 난항을 겪었던 일, 그걸로 내가 그녀와 다툰 일 (그녀는 어쨌든 결과가 좋으면 다 된 거다, 어쨌든 내가 끼어들어 일이 진행되지 않았느냐, 하는 입장이었고, 나는 이렇게 당신 혼자 결정하고 우린 따르기만 할 거면 프로젝트 계획은 왜 하는 거며 그걸 진행하던 팀의 사기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따졌었다).
내 회의 진행 방식에 딴지를 걸길래 (외부 회의였고, 사전 협의로 미리 문제점을 다 전달했고, 외부업체가 그에 대한 답을 PPT로 발표, 원만한 합의로 마무리되었는데, 우리 쪽에서 준비한 PPT가 없었다고 딴지 - 이미 내용 요약해서 그녀에게 회의 전에 이메일로 보내고 확인받았는데도. 거기다 내 질문이 모호했다고 딴지, 등등),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묻자, 고의였는지 아닌지 내가 외국인이라 그런지 영어 문제라며 말을 했다가 그걸로 내가 항의한 일.
편애가 심하고 한번 눈밖에 난 이들에게는 잔인하게 굴던 그녀. 자신 말을 잘 듣고 충성하는 이들과, 영업 쪽 사람들은 언변과 융통성이 좋다고 유달리 칭찬하던 그녀.
여기까지 생각하자, 어쩐지 이 상황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아. 나는 눈 밖에 났구나.
저 사람은 S를 수장으로 앉히고 싶은데, 그렇다고 나를 잘라내기에는 위험도가 크니, 이런 기괴한 조직 개편을 생각해 낸 거구나.
이 결정이 전해진 뒤, 처음에 내 팀원들은 B1이 내게 흡수된다는 사실에 올게 왔다며 수긍하다가 대신 S가 내 상사가 된다는 말에 할 말을 잃고 내 눈치를 봤다. 나와 비슷한 직급의 다른 동료들은 내게 연락해 놀라움과 의문을 표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결정을 내렸냐고, 혹시 내가 어디 가기라도 하는 거냐고, 그리고 이 새로운 조직 구성에 어떤 장점이 있는 거냐고.
이미 결정이 났기 때문에 나는 뭐라고 더 말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쓰게 웃고 말았지만, 솔직히 속이 뒤집혔다. 인사과도 내 상사 눈치만 보고 있는데, 물살을 세게 타고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고 있는 그녀에게 어떻게, 누가 이의를 제기할까.
그래도 이 개 같은 상황에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내가 너무 안일했다는 거다.
학회에 있을 때는 Line manager가 있어도 보통 수평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딱히 상사 눈치를 본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공무원이었을 때는 철저하게 수직 관계였지만, 인사과의 힘도 크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갑질로 논란이 생길 수도 있어 상사라고 제멋대로 결정을 내릴 순 없었다.
그래서일까, 상사의 힘이 이렇게 클 줄, 특히 권력을 쥔 상사의 결정권과 그 사람의 호불호가 이렇게 영향을 끼치게 될 줄 모르고 내가 너무 대놓고 대들었던 거겠지. 그랬다가 기회만 보고 있던 상사에게 호되게 망치로 두들겨 맞은 거고.
만약 내가 오랫동안 사기업에 다녔더라면 슬롯생활 초반부터 진작 익혔을 생존 기술이었을 텐데.
아니, 사실 나는 그 권력 구조가 싫어서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하는 대신 학회 같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업군으로 방향을 틀었던 거였다.
그렇게 다른 직업군에서 충분히 경험치를 쌓았으니, 사기업이라는 정글에서 마음껏 뛰어도 되는 군번은 된다고 자만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속 좋게 뛰어다니다가 된통 물렸으니 아직도 상처가 쓰라리고, 단전에 쌓인 화 때문에 문득문득 주화입마라도 올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호기롭게 사직서를 내던지거나 게임 종료 버튼을 누를 수도 없는데.
매일 'work is work'라는 주문을 되새기고, 'professionalism'을 가면처럼 덮어쓰고 출근한 뒤, 퇴근 후에는 이직 준비를 할 수밖에.
[추가]
어쩌면 정말로 그녀는 이 판단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일을 잘하니 내게 팀을 다 몰아주고, 그렇다고 S를 자르거나 다른 데 보낼 수도 없으니 그를 수장으로 앉히자고. 이쪽 분야의 일은 잘 몰라도 S는 말 그대로 회사에 아는 사람도 많고 입 터는 건 잘하니 어떻게 보면 나와 S의 장점을 다 살릴 수 있는 좋은 선택이었다며 스스로 뿌듯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게 내가 이해를 한다고 해서 이미 시궁창에 처박힌 내 기분이 나아지거나, 이 상황에 수긍하고 이전과 같은 열정이 생겨나진 않을 거다. 나는 재주 부리는 곰이 아니라서, 내가 재주를 부렸으면 내가 나서서 갈채를 받고 돈도 받았으면 좋겠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