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창 선자령
2026년 1월의 마지막날, 세 번의 캠핑 연습 후 첫 노지 백패킹으로 선자령에 올랐다. 예상보다 바람이 강했고 다른 텐트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황량했던 선자령의 '바람의 언덕'에 서서 텐트를 어디에 설치할까 하는 고민을 오래 했다. 캠핑장처럼 지정된 데크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무가 앙상했던 숲길의 몇몇 박지가 떠올랐지만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사람이 많은 곳이 좋겠지' 하며 그대로 바람의 언덕에 텐트를 설치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현명하지 못했다.
주말에는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만 해도 한참이 걸린다. 일찍 출발했지만 생각보다 늦은 오후 2시에 대관령마을휴게소에 도착해 등산을 시작했다. 오르는 길이 군데군데 얼어 있었고 더러는 진창이 되어 있었다. 배낭을 내려 트레킹폴과 아이젠을 꺼낼까 하다 번거로워서 그대로 올라갔다.
이 시간대에는 올라가는 사람보다 내려오는 사람이 더 많다. 산에서의 백패킹은 등산객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늦은 시간에 산을 오르고 해가 질 무렵에 텐트를 설치한다. 그리고 아침 등산객이 오르기 전에 텐트를 철수한다. 아스팔트 임도를 지나 숲길에 들어서자 주위 풍경으로 1100m의 고도가 실감됐다. 이름 모를 식물들이 몇 년 전에 올랐던 한라산과 조금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백패킹을 시작하고 이것의 재미가 무엇인지 조금씩 체득하고 있었지만 사실 대부분이 고생이다. 짐을 꾸리고, 박지로 이동하고, 텐트를 설치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이른 저녁에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다시 했던 것의 반복을 거쳐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와서도 짐을 정리하는 시간이 뒤따른다.
그 노동이라고 생각되는 대부분의 과정 속에서 반짝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숲을 거실 삼아 하는 식사, 아침의 새소리와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새하얀 눈에 뒤덮인 산 같은 것들. 그리고 선자령을 오르는 이 길에서 또 다 다른 재미를 알았다. 완만하지만 짧지 않았던 오르막에서 숨을 마시고 내쉬는 규칙적인 시간이 평온으로 다가온 것이다. 15kg 무게의 배낭을 메고 있기 때문에 평소의 등산보다 천천히 올랐지만 그 고요함을 느끼는 것은 백패킹만의 매력일 것이다.
선자령 하면 으레 떠올리는 설산을 나도 기대했다. 그러나 바람의 언덕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황량한 풍경은 나를 잠깐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1월 치고는 따뜻했던 날씨에 눈이 내리지 않아서 조금은 예상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언덕의 풍광은 일품이었다.
숲길을 나오고 난 뒤부터는 몰아치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 소프트쉘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는데도 손이 차가웠다. 재킷의 모자를 뒤집어썼지만 그 사이로 칼바람이 불어와 양쪽 볼과 귀가 시렸다.
텐트를 설치한 바람의 언덕 주위에는 네다섯 개의 텐트가 더 있었다. 바로 옆의 풍력터빈은 부웅부웅 하는 소리를 크게 냈다. 마른 잔디로 버석거리는 땅이 꽁꽁 얼어서 팩 몇 개를 부러뜨렸지만 다행히 따로 챙겨 온 단조팩(고강도 텐트팩)으로 가이라인까지 마쳤다.
텐트 설치를 마칠 즈음에는 주위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서쪽으로 지는 멋진 풍광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싶었지만 차디찬 바람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해가 지자마자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텐트 안은 옷에 딸려 들어온 마른 잔디가 정전기로 인해 텐트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아주 어수선했다는 이야기. 세게 부는 바람 때문에 텐트 설치에 애를 먹었고 덕분에 허기가 졌다. 냉동 볶음밥과 프랑크 소시지 2개를 발열팩으로 데워 먹고도 허기가 가시지 않아 발열팩으로 끓이는 라면 하나를 더 먹었다.
노지라는 부담 때문에 술은 많이 챙겨 오지 않았다. 500ml 캔맥주 하나와 200ml 소주 힙플라스크 하나.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번에야말로 읽으리라 생각했던 전자바카라은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영하 7도의 텐트 안 온도가 문제인 듯했다. 야심 차게 새 바카라을 다운로드했는데 아쉬움이 컸다. 일찍 잠에 드는 수밖에.
자정을 전후해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낮에 시끄럽게 들리던 풍력터빈 소리가 바람 소리에 묻힐 정도였다. 침낭 안에 누워서 반쯤 뜬 눈으로 하염없이 휘청거리는 텐트 천장을 보며 '이래도 되나...'라고 생각했다. 바람을 맞는 텐트의 한쪽 면은 바닥에 누울 것처럼 짓눌려 있었다. 텐트가 버텨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밤이었다.
다행히 텐트는 버텨주었다. 일출시간에 맞춘 알림은 필요 없었다. 어제저녁에 먹은 라면이 원래 아침식사였기 때문에 일찍 텐트를 정리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 마주한 일출은 뜬눈으로 지새운 밤이 억울하지 않게 해 주었다. 빼곡히 들어선 산 끝에서 피어오르는 아침 해가 비현실적이었다.
텐트를 설치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철수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대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텐트를 여러 번 날려먹었고 그때마다 전력질주를 해야 했다. 찬바람으로 손가락이 얼어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서둘러 텐트를 배낭 안에 욱여넣고 선자령을 내려왔다. 1시간 만에 도착한 휴게소에서 라면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뭐든 따뜻한 것을 먹어야 했다. 휴게소 커피는 기대하지 않는 편인데 커피 맛이 좋았다. 찬 바람 때문이었을까.
설산을 기대하고 온 선자령은 내게 거센 바람만을 주었다. 내려오는 숲길은 바람이 없어 고요했고 몇몇 박지에 텐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만약 이곳을 박지로 삼았다면 조금은 아늑한 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정답을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겪는 경험은 내 자산의 일부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설산은 아니었지만 일몰과 일출을 온전히 마주했으니 아쉬움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