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은 홍차만 담지 않는다

오늘, 마음이 쉬어갑니다

by심월


우리는 많은 것을 움켜쥐며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소중한 것을 붙잡으려 하고,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되돌리려고 애쓴다. 어렵게 쌓아온 것들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우리의 바람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해오던 일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오고, 소중한 사람이나 반려동물을 잃기도 한다. 그럴 때면 무언가를 잃었다는 사실도 가슴 아프지만, 그것이 사라진 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망연자실할 때가 더 많다.


그림바카라 『채운다는 것』에는 이와 비슷한 일을 겪는 작은 찻잔 하나가 등장한다.


주인공 ‘잔’은 할머니의 홍차를 담는 고급스러운 찻잔이다. 어릴 때부터 훌륭한 찻잔이 되려고 부단히 배우고 노력했다. 그런 잔에게 할머니의 홍차를 담는 일은 더없이 자랑스럽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정원에서 차를 준비하던 중 까마귀에게 물려가 숲 속에 떨어진 것. 할머니도, 향긋한 홍차도 없는 낯선 숲에서 잔은 깊은 슬픔에 빠진다. 더 이상 홍차를 담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자신의 존재 가치마저 잃어버린 듯하다.


그렇게 텅 빈 채로 지내던 어느 날, 작은 꽃잎 하나가 잔 안으로 떨어진다. 그때 잔은 자신이 담을 수 있는 것이 홍차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 토끼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내어주고, 아기 오리들의 보호소가 되어준다. 개구리들에게는 목욕탕이 되고, 나비들에게는 카페가 되어주기도 한다. 홍차를 담던 찻잔으로서의 역할은 끝났지만,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 깃들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라.


에밀리 디킨슨은 시 〈만약 내가〉에서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주고, 지친 새 한 마리가 둥지로 돌아가도록 도울 수 있다면 자신의 삶은 헛되지 않다고 노래한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잔도 그러했다. 자신이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에만 매달리다가 이제는 다른 생명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내어준다. 무언가를 채우는 일에서 가치를 찾는 게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일에서도 삶의 기쁨을 발견한 것이다.


얼마 전 그림바카라명상 고급과정에서 ‘비움글쓰기 수행’을 진행했다. 하루에 한 가지씩 실제로 물건을 나누거나 비우고, 그 경험을 짧게 기록하는 수행이다.


방법은 간단하지만 실천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몇 해째 사용하지 않은 물건을 앞에 두고 ‘언젠가는 쓸 데가 있겠지’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물건을 버리는 건 어렵기 때문이다.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떨쳐내기 힘든 유혹이다.


이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버렸는가보다, 그 물건을 붙잡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일이다. 채우는 데는 익숙하지만 비우고 덜어내는 데는 서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달이 차면 기울고,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는 건 자연의 이치다. 우리네 삶도 다르지 않을 테다. 변화는 삶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때로는 스스로 덜어내고 비우는 연습도 필요하다. 비움을 알아야 채움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그림바카라의 마지막 장면에서 잔은 달빛을 품는다. 그 주위로 작고 소박한 꽃들이 가득 피어난다. 더 이상 할머니의 홍차를 담지는 못하지만, 잔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다채로워졌다.


물론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건 누구에게나 두렵다. 그렇다고 서둘러 빈자리를 채울 필요는 없다. 한동안 텅 빈 채로 있어도 괜찮다. 어쩌면 그 빈자리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삶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작은 명상]

오늘은 내 곁에 오래 머물러 있는 물건 하나를 찾아봅니다. 여전히 필요한 것인지, 익숙하다는 이유로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봅니다. 놓아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기꺼이 비워봅니다. 그때 내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가만히 알아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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