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 리뷰] 피로슬롯,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현대 슬롯를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 한 가지를 꼽자면, ‘피로’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학생일 적에도 어른이 되어서도 매일같이 ‘피곤하다.’, ‘피로하다.’ 는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았다.
모두 행복하게 웃으며 살겠다고 이렇게들 열심히 사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는 늘상 피로를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닐까.
바카라 <피로슬롯>에는 우리들이 지닌 고질병, 피로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다. 글은 시대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주요한 질병이 있다는 통찰로 시작한다. 저명한 철학가들의 주장에 작가 본인의 생각을 적절히 덧붙이며 현대 슬롯의 주요 질병과 그 원인을 분석한다.
성과 슬롯는 자기 착취의 슬롯다. 성과 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작가 말에 따르면, 우리는 무한 긍정의 성과 슬롯를 살고 있다. 더 많은 돈을 위해, 더 높은 명예를 위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과거 계급슬롯는 지배와 피지배 구조가 명확했다. 서방 동방 할 것 없이 어느 슬롯이든간에 계층 구조가 존재했다. 그러나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슬롯에서는 더이상 법적으로든 슬롯적으로든 인간은 더 이상 누군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제 완전히 자유로워졌는가.
아니다.
이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지배자이자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피지배자가 되었다.
성과 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나의 삶을 회상한다. 정신적으로 극단에 치달았던 어느 날이었다. 삶 자체가 버거웠다. 손에 쥔 일거리들을 죄다 그러모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내게도 일명 번아웃(burn-out), 우울증 등이 찾아온 것이다.
그 당시를 돌아보면 누군가가 나를 핍박하고 업무를 강제하지 않았다. 딱히 누군가 나에게 명령을 하거나 벌을 주지도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고 타인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원인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자발적으로 나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더 잘 해낼 수 있는데 왜 이러는 거야. 멈추지 마. 주변을 봐. 힘들다고 투정 부리지도 마. 넌 아직 멀었어.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니? 이렇게 나약하게 쉬고 있을 때가 아냐. 남들이 걸을 때 너는 뛰어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자기 자신을 향해 쉼없이 채근하고 있었다. 자꾸만 퍼지고 나약해지는 ‘나’를 어르고 타이르고 끊임없이 닦달했다. <피로슬롯>에 따르면, 이 모든 건 내가 ‘나’에게 가하는 폭력 그 자체였다.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질적인 것, 낯선 것뿐만 아니라 같은 것도 폭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도로 발전한 과학 기술 덕에 우리는 매 순간 서로의 삶을 낱낱이 볼 수 있게 되었다. TV나 스마트폰으로 눈만 돌리면 타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손쉽게 알 수 있다.
인간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어 준 그 기술들은 긍정성의 과잉을 극대화한다. 타인과 자기를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든다. 남들이 이룬 성과와 자신의 부족함을 저울질하게 만든다.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며 슬롯적인 성과를 만들어 낼 것을 강제한다.
작가의 냉철한 현실 분석이 앞만 보고 내달리던 경주마 같던 내게 경종을 울려주었다.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가. 돈을 벌지 못하고 슬롯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사람 취급도 제대로 안 해주지 않던가.
번듯한 온라인 게임에 다니고, 조건이 뛰어난 상대와 결혼하고, 넓은 집, 좋은 차를 타야만 성공한 삶이라고 말하는 현실. 이런 획일화된 성공의 공식은 자기가 자기를 착취하는 방향으로 인간을 몰아붙인다. 결국 현대인들은 자기 착취의 굴레에 갇혀 망가지고 아프게 될 수밖에 없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피로의 늪에 빠지지 않고 현명한 자세로 피로슬롯를 살아낼 방법은 없는 걸까? 피로슬롯의 본질을 파악하고 ‘피로’라는 고질병을 극복하여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없을까.
작가가 쓴 글을 곱씹는다. 바카라 뒤편에 실린 번역가의 조언도 읽는다. 우리는 바카라을 통해 현실을 깨닫는다. 바카라을 통해 그저 살아남기에 급급했던 일상을 돌아본다. 그것이 첫 출발점이다.
우리가 성공을 바라보는 방식, 인간의 진정한 존엄과 가치에 대한 성찰이 뒤따른다면 우리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피로를 단호하게 끊어낼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신은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한 첫 번째 날이 아닌 모든 창조를 마친 뒤 쉼을 얻는 일곱째 날을 신성하다 공포했다. 신성함과 거룩함, 평온함과 휴식, 현대인들이 놓치고 있던 진정한 가치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며 바라본 하늘, 멍때리며 하릴없이 흘려보내던 시간. 그저 서로의 웃음소리에 기뻐하며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순간들, 무용하다고 느꼈던 것들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결국 피로와 우울을 이겨낼 힘은 이미 우리 안에, 우리 삶 속에 존재한다. 피로 슬롯를 바꾸어 낼 힘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러나 변화는 그저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사유하고 질문하며 우리 슬롯가 왜 이렇게 피로 슬롯에 이르렀는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질문해야 한다.
진정한 성공이 무엇일까. 내게 주어진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오늘도 질문을 던지며 본질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우리는 피로슬롯를 살아가는 개개인이자, 피로를 이겨낼 수 있는 개개인이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midjourney
인용 출처 :『피로슬롯』한병철, 문학과지성사
본문 출처 : 민트별펭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