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사랑한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었다

22화. 사랑한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었다

“누구야?”

도진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서연은 엘리베이터 층수를 바라봤다.

5.
6.

그리고 옆에는 지난 촬영장에서 만났던 남자가 서 있었다.

“서연 씨, 7층 맞죠?”

남자가 다시 물었다.

서연은 짧게 대답했다.

“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서연은 먼저 내렸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도진아, 나 지금 미팅 가는 중이야.”

“그러니까 누구냐고.”

역시.

서연은 피식 웃었다.

“지난번 촬영장에서 만났던 분.”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그 침묵만으로도 도진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남자?”

“어떤 남자?”

“당신한테 연락처 물어보려고 했다는 사람.”

서연은 걸음을 멈췄다.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

“그걸 어떻게 잊어.”

“참나.”

“같이 있어?”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났어.”

“우연히?”

도진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서연은 한숨을 쉬었다.

“도진아.”

“왜.”

“오늘 나 중요한 미팅이야.”

“알아.”

“나 긴장돼.”

도진이 조용해졌다.

서연은 복도 끝 회의실 문을 바라봤다.

“그래서 지금 당신 질투까지 달래줄 여유가 없어.”

“내가 언제 질투했다고.”

“하고 있잖아.”

“그냥 물어본 거야.”

서연이 웃었다.

“당신은 질투할 때마다 꼭 그냥 물어봤대.”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 들어가야 해.”

“서연아.”

“응?”

잠깐의 침묵 뒤 도진이 말했다.

“잘하고 와.”

서연의 표정이 풀렸다.

“응.”

“긴장하지 말고.”

“응.”

“그리고.”

서연은 또 시작인가 싶었다.

“뭐?”

“끝나면 전화해.”

“알았어.”

서연은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만큼은 도진의 여자이기 전에 서연이고 싶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도 좋았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찾아가는 사람이고 싶었다.

서연은 회의실 문을 열었다.

안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지난번 촬영에서 봤던 관계자와 처음 보는 여자,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남자였다.

서연은 순간 멈칫했다.

“앉으세요.”

관계자가 자리를 권했다.

서연은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분은 이미 아시죠?”

남자가 웃었다.

“네. 지난번에 뵀습니다.”

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관계자가 서류를 넘겼다.

“이번에 저희가 준비하는 영상이 하나 있어요. 중년 남녀의 재회를 다루는 짧은 작품입니다.”

서연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재회요?”

“네. 젊을 때 헤어진 두 사람이 오랜 시간이 지나 우연히 다시 만나는 이야기예요.”

관계자가 맞은편 남자를 바라봤다.

“두 분을 같이 보고 싶어서 오늘 같은 시간에 모셨습니다.”

서연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남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오늘은 파트너네요.”

서연도 웃으며 손을 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 도진이 떠올랐다.

만약 이 장면을 봤다면.

서연은 속으로 웃었다.

‘큰일 나겠네.’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대본이 주어졌다.

짧은 장면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첫사랑을 다시 만난 여자.

남자가 먼저 대사를 했다.

“많이 변했네.”

서연이 대본을 보며 말했다.

“당신도요.”

“가끔 내 생각했어?”

서연은 잠시 멈췄다.

대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묘했다.

남자의 눈빛이 생각보다 진지했다.

서연은 대본에서 시선을 들었다.

“아니요.”

관계자가 말했다.

“조금 더 감정을 넣어볼까요? 잊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잊지 못했던 느낌으로.”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시작했다.

남자가 물었다.

“가끔 내 생각했어?”

이번에는 서연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몇 초 동안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안 했다고 하면 믿을 거예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관계자의 표정이 달라졌다.

“좋아요.”

서연의 심장이 뛰었다.

“한번 더 가볼게요.”

두 번째.

세 번째.

반복할수록 서연은 조금씩 카메라 앞의 자신을 잊었다.

누군가를 연기한다기보다 자신의 오래된 감정을 꺼내놓는 기분이었다.

기다림.

그리움.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사랑하면서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

그 감정들을 서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좋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 관계자가 웃었다.

“서연 씨, 감정이 좋으시네요.”

서연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감사합니다.”

“연기 배워보신 적 있으세요?”

“제대로는 없어요.”

“그런데 카메라가 좋아하는 표정이 있어요.”

서연의 가슴이 뛰었다.

그 말이 좋았다.

잘생겼다는 말도,

예쁘다는 말도 아니었다.

카메라가 좋아하는 표정.

자신에게 아직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미팅이 끝나자 서연은 복도로 나왔다.

함께 연기했던 남자가 뒤따라왔다.

“서연 씨.”

“네?”

“아까 정말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특히 마지막 표정.”

서연이 웃었다.

“저도 제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남자가 잠시 서연을 바라봤다.

“진짜 누군가 생각하면서 한 거죠?”

서연의 웃음이 멈췄다.

“네?”

“느낌이 그랬어요.”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웃었다.

“남자친구?”

서연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는 망설이지 않았다.

남자가 조금 아쉬운 듯 웃었다.

“부럽네요.”

“뭐가요?”

“그런 표정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게.”

서연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남자와 헤어졌다.

혼자가 되자 서연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도진에게서 메시지가 세 개 와 있었다.

끝났어?

아직이야?

전화해.

서연은 웃었다.

전화를 걸었다.

신호 한 번 만에 도진이 받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첫마디였다.

“미팅하느라.”

“그 남자도 같이 있었어?”

서연은 눈을 감았다.

“도진아.”

“왜.”

“나 오늘 칭찬받았어.”

도진이 잠시 조용해졌다.

“무슨 칭찬?”

“카메라가 좋아하는 표정이 있대.”

도진이 웃었다.

“그건 내가 먼저 알았는데.”

“당신이 언제?”

“당신 사진 볼 때마다.”

서연은 순간 웃음이 났다.

“또 말은 잘해.”

“진짠데.”

“그리고 나 연기도 했어.”

“무슨 연기?”

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중년 남녀 재회하는 장면.”

“누구랑?”

역시.

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당신은 내용보다 상대가 더 중요하지?”

“아까 그 남자야?”

“응.”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서연은 일부러 기다렸다.

도진이 물었다.

“무슨 장면인데?”

“첫사랑이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장면.”

“손잡아?”

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안아?”

“안 안아.”

“키스는?”

“야!”

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

주변 사람들이 돌아봤다.

서연은 황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당신 미쳤어?”

도진이 웃었다.

“확인하는 거야.”

“그런 장면 없어.”

“다행이네.”

“있으면?”

도진이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있으면 나 못 하게 할 거야?”

도진의 대답이 늦어졌다.

“싫기는 하지.”

서연의 웃음이 조금 사라졌다.

“그런데?”

도진은 한숨을 쉬었다.

“해야 하는 일이면 해야겠지.”

서연은 걸음을 멈췄다.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진짜?”

“나도 연기랑 진짜를 구분은 해.”

“질투쟁이가 웬일이야.”

“대신.”

“또 대신.”

“끝나고 나한테 와.”

서연은 웃었다.

“왜?”

“내 여자 맞는지 확인하게.”

“뭘로 확인할 건데?”

말이 나오자 두 사람 모두 잠시 조용해졌다.

서연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도진이 먼저 웃었다.

“당신 지금 무슨 생각했어?”

“아무 생각 안 했어.”

“거짓말.”

“끊는다.”

“서연아.”

“왜.”

도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축하해.”

서연의 걸음이 멈췄다.

“뭐가?”

“오늘 잘했다며.”

“아직 된 것도 아닌데.”

“그래도.”

잠시 침묵.

“당신 하고 싶은 거 하나씩 하는 거 좋잖아.”

서연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진은 자신을 붙잡을 것 같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남자가 있는 자리를 싫어하고,

자신이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할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질투하면서도 보내주는 사람.

불안하면서도 응원하려는 사람.

서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진아.”

“응.”

“나 더 열심히 해볼까?”

“해.”

“나이 들어서 웃기지 않아?”

도진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뭐가 웃겨.”

서연은 가만히 들었다.

“당신이 하고 싶은 건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그 말에 서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사실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묻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이 나이에?

지금 와서?

무슨 배우?

무슨 모델?

하지만 도진은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해.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고마워.”

“또 고맙대.”

“고마우니까.”

도진이 웃었다.

“그럼 밥 사.”

“왜 내가 사?”

“나 응원했잖아.”

“당신이 사.”

“왜?”

서연도 웃었다.

“내가 배우 되면 당신이 매니저 해야 하니까.”

“싫어.”

“왜?”

“남자 배우들하고 싸우느라 바쁠 것 같아.”

서연이 크게 웃었다.

그날 저녁,

서연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테스트 결과가 좋았습니다.

촬영 일정 조율을 위해 연락드리겠습니다.

서연은 한참 그 문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제일 먼저 도진에게 보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축하해, 배우님.

서연은 웃으며 답했다.

배우님은 무슨.

도진이 다시 보냈다.

그러니까 나중에 유명해져도 모른 척하지 마.

서연은 장난스럽게 적었다.

그건 도진 씨 하는 거 봐서.

답이 바로 왔다.

또 시작이네.

서연은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보냈다.

안 사라지면 돼.

이번에는 도진의 답장이 한동안 오지 않았다.

몇 분 뒤.

짧은 문장이 도착했다.

안 사라질게.

서연은 그 말을 오래 바라봤다.

불꽃이 아니라 등불이 되고 싶다고 했던 밤.

그 말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처음 생각했다.

하지만 서연은 아직 몰랐다.

촬영 일정이 확정되는 순간,

두 사람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이 다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시간.

촬영은 일요일이었다.

바로,

도진이 어렵게 비워두었다고 했던 그날.

서연은 일정표를 바라봤다.

그리고 휴대전화 속 도진의 이름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선택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하루인지.

자신에게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새로운 삶인지.

하지만 서연은 아직 알지 못했다.

이번 선택이 도진에게 단순히 하루의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떤 사랑을 할 것인가를 묻는 첫 번째 시험이 되리라는 것을.

22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