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은 웃었다.
27화. 사랑만으로는 묻지 못했던 것
“우리 왜 이렇게 힘들게 좋아하냐.”
서연이 물었을 때 도진은 웃었다.
“그러게.”
“조금 덜 좋아하면 편할 텐데.”
그리고 한참 뒤 도진이 말했다.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왜?”
“이미 늦었잖아.”
그날 밤 그 말은 서연의 가슴에 오래 남았다.
이미 늦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좋아해 버렸다는 말.
그런데 이상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서연은 오히려 겁이 났다.
처음에는 도진의 마음이 궁금했다.
나를 좋아할까.
보고 싶어 할까.
다른 여자에게도 이렇게 다정했을까.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궁금해할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질문이 달라졌다.
이 사람과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리고 더 무서운 질문 하나.
도진은 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연은 생각했다.
아마 절반도 모를 것이다.
도진이 알고 있는 서연은 잘 웃는 여자였다.
일을 많이 하는 여자.
힘들어도 씩씩하게 버티는 여자.
가끔 엉뚱한 일을 벌이고, 카메라 앞에도 서보고,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며 새로운 일에 덤비는 여자.
남자들이 주변에 있다고 질투하게 만드는 여자.
그리고 자신을 좋아해 주는 여자.
하지만 그것이 서연의 전부는 아니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보여주고 싶은 얼굴과 숨기고 싶은 얼굴이 있었다.
서연에게도 있었다.
오래 살아온 시간만큼 정리되지 않은 관계가 있었고,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바카라임이 있었고,
매달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진을 사랑하면서도 마음 한쪽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너에게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그 생각이 들 때마다 서연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사랑에 자격이 어디 있어.
마음이 움직이는 데 허락이 어디 있어.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다가도 도진이 먼 미래 이야기를 꺼내면 겁이 났다.
칠십이 되어도.
그 이후에도.
함께 여행하고.
같이 밥 먹고.
늙어가는 얼굴을 서로 바라보는 것.
서연도 원했다.
아주 많이.
그래서 더 무서웠다.
꿈처럼 말해버리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까이 있었으니까.
며칠 뒤였다.
도진에게 전화가 왔다.
“뭐 해?”
“일하지.”
“오늘 몇 시에 끝나?”
“왜?”
“그냥.”
서연이 웃었다.
“당신의 그냥은 이제 못 믿는다니까.”
“몇 시에 끝나냐고.”
서연이 시간을 말했다.
도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끝나고 잠깐 볼까?”
서연은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고 화면을 봤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뭐?”
“왜.”
“당신 오늘 일 안 해?”
“해.”
“그런데?”
“끝나고 가려고.”
“여기까지?”
“응.”
서연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시간.
도진은 일을 마치고 두 시간을 오겠다는 것이었다.
몇 시간을 함께 있지도 못한다.
서연도 다음 날 새벽이면 다시 일어나야 했다.
“미쳤어?”
“왜.”
“왔다가 언제 가려고.”
“막차 있잖아.”
“도진아.”
“응.”
“나 한두 시간밖에 못 봐.”
“알아.”
“그런데 두 시간을 와?”
도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보고 싶으니까.”
그 한마디에 서연의 마음이 무너졌다.
예전 같으면 너무 좋았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오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도진의 두 시간도 보였다.
그가 돌아갈 두 시간도 보였다.
내일 일해야 할 피곤한 얼굴도 보였다.
사랑하면 받는 것만 행복한 줄 알았는데,
사랑이 깊어지니 상대가 자신에게 쓰는 시간까지 아까워졌다.
“오지 마.”
도진이 조용해졌다.
“왜?”
“힘들잖아.”
“내가 힘든 건데 당신이 왜 결정해.”
서연은 말문이 막혔다.
얼마 전 자신이 도진에게 했던 말이었다.
당신 관계잖아.
당신이 정해.
도진이 그대로 돌려주고 있었다.
“그래도.”
“나 갈 거야.”
“고집 진짜.”
“당신이 더 세.”
서연은 웃었다.
“알았어.”
“진짜?”
“응.”
“나오라고 하면 나와.”
“알았어.”
전화를 끊은 뒤 서연은 이상하게 마음이 들떴다.
몇 시간 뒤면 도진을 본다.
그것만으로 일하는 시간이 달라졌다.
힘들다가도 웃음이 났다.
시계를 자꾸 봤다.
평소에는 빨리 끝나기를 바라던 일이 오늘은 더 빨리 지나갔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메시지가 왔다.
거의 다 왔어.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뛰었다.
거울을 한번 보고 머리를 만졌다.
입술도 한번 확인했다.
그러다 웃었다.
“참나. 누구 보여준다고.”
이미 다 본 사람인데.
피곤한 얼굴도,
화장기 없는 얼굴도,
일하다 지친 얼굴도 봤는데.
그래도 도진을 만날 때는 조금이라도 예쁘고 싶었다.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차가웠다.
서연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길 건너편에서 도진을 발견했다.
검은 옷.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서연이 나올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도진이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서연은 알았다.
두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 사람이 저기 서 있는 순간에는.
서연은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도진이 손을 들었다.
“기다려.”
서연은 멈췄다.
신호가 바뀌었다.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
서연도 걸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 점점 빨라졌다.
도진 앞에 도착했을 때 숨이 조금 찼다.
“왜 뛰어.”
“안 뛰었어.”
“뛰었잖아.”
“빨리 걸은 거야.”
도진이 웃었다.
“보고 싶었나 보네.”
서연이 그의 팔을 툭 쳤다.
“당신이 왔으니까 나온 거지.”
“그게 그거지.”
도진은 자연스럽게 서연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서연은 마음이 놓였다.
며칠 동안 마음속에서 뒤엉켜 있던 생각들이 잠시 사라졌다.
둘은 늦은 저녁을 먹었다.
별것 없는 식사였다.
뜨거운 국물 하나.
밥 두 공기.
반찬 몇 가지.
그런데 서연은 좋았다.
“맛있어?”
도진이 물었다.
“응.”
“많이 먹어.”
“당신도.”
도진은 밥을 먹다가 서연을 바라봤다.
“왜?”
“당신 요즘 얼굴 좀 상했어.”
“내가?”
“응.”
“나 원래 예뻐.”
“누가 안 예쁘대.”
서연이 웃었다.
“그럼 됐어.”
도진은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다가 말했다.
“일 좀 줄이면 안 돼?”
서연의 손이 잠시 멈췄다.
“왜.”
“너무 많이 하잖아.”
“해야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평범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도진은 아직 몰랐다.
서연이 왜 하루치 일을 그렇게 아까워하는지.
왜 쉬는 날에도 일을 찾는지.
왜 몸이 아파도 출근하는지.
왜 촬영 하나를 가면서도 먼저 손익부터 계산하는지.
도진은 단순히 서연이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서연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도진아.”
“응.”
“나 그냥 일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야.”
도진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알아.”
“아니. 당신은 몰라.”
도진은 서연을 바라봤다.
서연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짧았다.
도진은 자신을 보기 위해 두 시간을 왔다.
곧 다시 두 시간을 돌아가야 한다.
이 짧은 시간에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말할게.”
도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나중에.”
“오늘은 그냥 좋은 얘기만 하자.”
“서연아.”
“응.”
“당신 전에 그랬잖아.”
서연은 그를 바라봤다.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 싫다고.”
그 말에 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도진은 자신의 과거를 말해야 했고,
자신은 괜찮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 했다.
도진이 말했다.
“나한테는 말하라고 해놓고 당신은 왜 안 해.”
“그게 아니라.”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아니.”
“그럼.”
서연은 도진의 눈을 바라봤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동시에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왜 이렇게 지쳤는지.
왜 사랑 앞에서도 자꾸 계산하게 되는지.
그리고 왜 도진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혼자 물러서려고 했는지.
“무서워서 그래.”
서연이 말했다.
도진의 표정이 굳었다.
“뭐가?”
“당신이 나를 다 알게 되는 게.”
도진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서연은 애써 웃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나는 꽤 괜찮은 여자잖아.”
“무슨 소리야.”
“잘 웃고, 일도 열심히 하고, 이것저것 해보려고 하고.”
서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런데 내 삶이 그렇게 예쁘지만은 않아.”
도진이 한참 서연을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누구 삶이 예쁘기만 해?”
서연의 눈이 흔들렸다.
“도진아.”
“응.”
“내 얘기 다 들으면.”
말끝이 흐려졌다.
도진이 기다렸다.
서연은 어렵게 말을 이었다.
“나한테서 조금 멀어지고 싶을 수도 있어.”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 서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괜히 말했다.
아직 말하지 말걸.
그런데 도진이 손을 내밀었다.
식탁 위에 놓인 서연의 손을 잡았다.
“말해봐.”
“싫어.”
“왜.”
“무서워.”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도진이 말했다.
“듣고 내가 결정할게.”
서연의 가슴이 철렁했다.
듣고 내가 결정할게.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서연은 그 말이 좋았다.
무조건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이해한다고 하지 않았다.
먼저 듣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판단하겠다고 했다.
그게 어른의 말 같았다.
서연은 도진의 손을 바라봤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손.
따뜻했다.
“오늘은 시간이 없잖아.”
“그럼 다음에.”
“언제?”
도진은 잠시 생각했다.
“이번에는 당신이 와.”
서연이 웃었다.
“왜 내가.”
“나 두 시간 왔잖아.”
“생색내네.”
“그러니까 다음에는 당신 차례.”
서연은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리고.”
“뭐.”
“그날 다 말해.”
서연의 웃음이 조금씩 사라졌다.
“다?”
“당신이 말하고 싶은 만큼.”
도진은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
“대신 혼자 결론 내리지 마.”
서연이 그를 바라봤다.
“무슨 결론.”
“내가 당신 알면 떠날 거라는 거.”
서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도진이 말했다.
“그건 내가 정하는 거야.”
서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짧은 만남은 너무 빨리 끝났다.
막차 시간이 가까워졌다.
서연은 시계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벌써 가야 해.”
도진도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게.”
둘은 역으로 걸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더 아쉬웠다.
도진은 서연을 보기 위해 두 시간을 왔다.
함께한 시간은 그것보다 짧았다.
그리고 다시 두 시간을 돌아가야 했다.
서연이 물었다.
“후회 안 해?”
“뭘.”
“이거.”
“뭐가.”
“나 잠깐 보겠다고 네 시간 길에 버리는 거.”
도진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서연을 바라봤다.
“버린 거 아닌데.”
“그럼?”
도진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쓴 거지.”
“뭘?”
“내 시간.”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진이 웃었다.
“당신한테.”
그 말 하나에 서연의 가슴이 무너졌다.
시간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썼다는 사람.
서연은 갑자기 도진의 손을 꽉 잡았다.
“왜.”
“그냥.”
“울려고?”
“아니.”
“눈 빨개졌는데.”
서연은 고개를 돌렸다.
“바람 불어서 그래.”
도진은 더 묻지 않았다.
역 입구 앞에서 두 사람은 또 멈췄다.
서연은 이 순간이 싫었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가.”
서연이 말했다.
도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 먼저 가.”
“오늘은 당신이 보내.”
“싫어.”
“왜.”
서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뒷모습 보기 싫다니까.”
도진은 잠시 서연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렸다.
“그럼 이리 와.”
서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도진의 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오래 안았다.
지난번 서연이 부탁했던 것처럼.
조금 더가 아니라,
아주 오래.
도진이 귓가에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응.”
“다 말해.”
서연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대답했다.
“응.”
“도망가지 말고.”
“응.”
“혼자 헤어질 생각도 하지 말고.”
그 말에 서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이 몇 번이나 혼자 관계의 끝을 생각했다는 것을.
서연이 도진의 옷자락을 더 꽉 잡았다.
“알았어.”
도진이 몸을 떼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연이 놓지 않았다.
“잠깐만.”
도진이 다시 가만히 있었다.
서연은 눈을 감았다.
이 남자의 체온을 조금 더 기억하고 싶었다.
곧 다시 혼자가 될 두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이제 됐어.”
서연이 먼저 떨어졌다.
도진이 개찰구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가다 돌아봤다.
서연은 그대로 서 있었다.
도진이 손을 들었다.
서연도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울지 않으려고 웃었다.
도진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서연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도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다음에는 당신 이야기 들으러 갈게.
서연은 한참 그 문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답했다.
후회할 수도 있어.
잠시 뒤.
도진의 답장이 왔다.
그것도 내가 결정해.
서연은 화면을 보며 결국 울고 말았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을 전부 보여주고 싶어 졌기 때문이었다.
좋은 모습도.
초라한 모습도.
말하지 못했던 관계도.
버텨온 시간도.
그리고 도진을 사랑하면서도 수없이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까지.
하지만 서연은 몰랐다.
다음 만남에서 자신이 꺼내놓을 이야기가 도진의 마음만 흔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서연 자신도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사랑은 상대에게 진실을 말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거짓말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27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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