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어머니의 손에는 계절이 없었다
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14화. 어머니의 손에는 계절이 없었다
1980년 8월.
장마가 물러간 서울의 골목에는 뜨거운 햇볕이 쏟아졌다.
며칠 전까지 빗물이 흐르던 골목의 하수구에서는 눅눅한 냄새가 올라왔고, 담장 아래 봉숭아는 여름 내내 내린 비를 견디고도 붉은 꽃을 피웠다.
황서윤은 마루에 엎드려 방학 숙제를 하고 있었다.
공바카라 위에는 여름방학 생활계획표가 펼쳐져 있었다.
아침 여섯 시 기상.
일곱 시 공부.
아홉 시 독서.
열한 시 자유시간.
서윤은 자신이 적어놓은 계획표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연필로 자유시간이라는 글씨 아래에 작은 글씨를 덧붙였다.
'엄마 돕기.'
그때 부엌에서 이정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아, 물 좀 마셔라.”
“응!”
서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엌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커다란 양은 대야에 빨랫감을 담그고 있었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서윤은 어머니의 얼굴을 살폈다.
“엄마, 더워?”
“여름인데 덥지.”
“선풍기 틀어.”
“빨래하다가 무슨 선풍기야.”
서윤은 방으로 뛰어가 선풍기를 끌고 나왔다.
낡은 선풍기는 돌아갈 때마다 덜덜거리는 소리를 냈다.
서윤은 전원을 켜고 바람의 방향을 어머니 쪽으로 돌렸다.
“이러면 되잖아.”
정순은 웃었다.
“아이고, 우리 딸 때문에 살겠네.”
서윤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엄마는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
정순은 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었다.
“말은 잘해요.”
그때 전옥분이 마루에서 말했다.
“정순아, 오늘 시장은 늦게 나가도 되지 않겠니?”
정순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오늘 물건 받는 날이에요.”
“밤새 바느질하고 또 나가려고?”
“해야지요.”
옥분은 한숨을 쉬었다.
“네 몸이 쇠로 만든 것도 아닌데.”
정순은 대답 대신 웃었다.
그 웃음이 서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
어머니는 힘들 때도 웃었다.
속상할 때도 웃었다.
누군가 걱정하면 괜찮다고 웃었다.
서윤은 어머니가 정말 괜찮은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날은 묻지 않았다.
어머니가 웃고 있으니 괜찮은 줄 알았다.
정순이 시장으로 나간 뒤 서윤은 할머니 옆에 앉았다.
옥분은 낡은 옷 한 벌의 터진 솔기를 꿰매고 있었다.
“할머니.”
“왜?”
“엄마는 왜 맨날 일해?”
옥분은 바늘을 멈추었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아빠도 일하잖아.”
“그렇지.”
“그런데 엄마도 그렇게 많이 해야 해?”
옥분은 잠시 손녀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질문은 단순했다.
그러나 대답은 단순하지 않았다.
“서윤아, 집이라는 건 말이다.”
옥분은 실을 잡아당겼다.
“기둥 하나로 서 있는 게 아니란다.”
“그럼?”
“기둥도 있어야 하고, 서까래도 있어야 하고, 지붕도 있어야지.”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잘 보이는 기둥만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
옥분은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지붕이 새지 않게 살피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바람이 들어오는 틈을 막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서윤은 할머니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게 엄마야?”
옥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도 그런 사람이지.”
서윤은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엄마가 안 하면 우리 집은 무너져?”
옥분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손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서윤은 눈을 깜빡였다.
옥분은 천천히 말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거지.”
“왜?”
“한 사람이 모든 걸 떠받치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사람이 무너지거든.”
서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옥분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엄마가 쉬어도 우리 집이 잘 돌아가게 만드는 게 우리 모두의 일이란다.”
그날 서윤은 할머니에게 바느질을 더 배우기로 했다.
어머니가 쉬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라도 늘리고 싶었다.
같은 날 오후.
김도현은 사랑채에서 박노식과 마주 앉아 있었다.
노식은 오래된 바카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김만석이 생전에 읽던 바카라들이었다.
도현은 먼지가 쌓인 바카라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아저씨, 이 바카라은 뭐예요?”
노식은 바카라등을 살폈다.
“족보입니다.”
“족보요?”
“집안의 조상들을 기록한 바카라이지요.”
도현은 조심스럽게 바카라장을 넘겼다.
빼곡한 한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우리 가족이 다 있어요?”
“오래전부터 내려온 분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도현은 한참 바카라장을 넘겼다.
그러다 물었다.
“그럼 저도 있어요?”
노식의 손이 멈추었다.
“도련님 이름은 아직 올리지 않았을 겁니다.”
“왜요?”
“나중에 정리할 때 올리겠지요.”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여자 이름은 왜 별로 없어요?”
노식은 대답을 고르느라 잠시 침묵했다.
“예전에는 집안의 계보를 주로 남자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도현은 바카라을 바라보았다.
“그럼 누나들은요?”
“누님들도 집안의 식구들이지요.”
“그런데 이름이 안 남으면 나중에 누가 기억해요?”
노식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질문 앞에서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도현은 바카라장을 덮었다.
“이상해요.”
“무엇이 말입니까?”
“사람은 다 엄마한테서 태어나는데, 왜 엄마 이름은 별로 없어요?”
노식은 숨을 멈추었다.
도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말했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이 아주 오래된 집안이라고 하셨어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래되었다고 다 좋은 건 아니잖아요.”
노식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도현은 족보를 바카라상 위에 내려놓았다.
“오래된 잘못도 있을 수 있잖아요.”
노식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오래전 김만석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들만 있으면 된다.'
그 말 한마디로 한 여자의 삶이 뒤바뀌었다.
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헤어졌다.
그리고 그 일을 결정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집안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믿었다.
노식은 조용히 말했다.
“도련님 말씀이 맞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예.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일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지요.”
도현은 조금 웃었다.
“그럼 저는 나중에 우리 가족 이야기를 따로 써볼래요.”
노식은 놀라 바라보았다.
“어떤 이야기 말입니까?”
“바카라에 없는 사람들 이야기요.”
도현은 족보를 가리켰다.
“누나들도 있고, 할머니들도 있고, 우리 집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있는 이야기요.”
노식은 한참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무거웠다.
그 이야기가 완성되려면 반드시 들어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한연화.
김씨 집안의 족보 어디에도 이름이 남지 않은 여자였다.
8월 중순.
정순의 의류 장사는 예상보다 어려워졌다.
장마가 길었던 탓에 여름옷을 팔 수 있는 기간이 짧아졌고, 도매상에서 받아온 물건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정순은 시장에서 돌아와 옷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그날따라 말수가 없었다.
서윤은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엄마, 오늘 장사 안 됐어?”
정순은 웃으려 했다.
“그냥 그렇지.”
서윤은 꾸러미를 열어보았다.
얇은 블라우스와 반소매 셔츠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이거 다 안 팔렸어?”
“응.”
“왜?”
“이제 여름옷을 사려는 사람이 별로 없나 봐.”
서윤은 옷을 한 벌 들어 올렸다.
연한 하늘색 블라우스였다.
“예쁜데.”
정순은 한숨을 쉬었다.
“예쁜 것하고 팔리는 건 다르더라.”
서윤은 옷을 펼쳐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엄마, 이거 그냥 가을에도 입으면 안 돼?”
“얇아서 춥지.”
“그럼 안에 입으면 되잖아.”
정순은 딸을 바라보았다.
“안에?”
“응. 긴팔 옷 안에 입으면 되지.”
정순은 잠시 생각했다.
서윤은 다른 옷도 꺼냈다.
“이건 조끼랑 입으면 예쁠 것 같아.”
옥분이 옆에서 웃었다.
“우리 서윤이는 옷을 참 재미있게 보네.”
서윤은 신이 나서 옷을 겹쳐보았다.
“엄마, 이렇게 같이 걸어놓으면 안 돼?”
정순은 딸이 펼쳐놓은 옷들을 바라보았다.
여름옷이라고 생각했던 물건들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녀는 웃었다.
“한번 해보자.”
다음 날 정순은 좌판에 옷을 새롭게 진열했다.
얇은 블라우스 위에 조끼를 겹쳐놓고, 긴팔 셔츠와 어울리는 색을 함께 배치했다.
손님들은 지나가다 한 번씩 멈추었다.
“이렇게 입어도 괜찮겠네.”
“안에 받쳐 입기 좋겠어요.”
정순은 웃으며 옷을 보여주었다.
그날 남아 있던 여름옷 몇 벌이 팔렸다.
큰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순에게는 작은 희망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서윤에게 말했다.
“우리 딸 덕분에 오늘 장사 좀 했다.”
서윤은 환하게 웃었다.
“정말?”
“응.”
“그럼 나도 장사 잘하는 거야?”
정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다.”
서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나중에 큰 가게 할 거야.”
옥분이 웃었다.
“얼마나 큰 가게?”
서윤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엄청 큰 거!”
정순은 딸을 바라보았다.
“큰 가게에서 뭘 팔 건데?”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
“그게 뭔데?”
서윤은 웃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지 뭐.”
세 사람은 함께 웃었다.
그날 밤 서윤은 공바카라 한쪽에 작은 가게를 그렸다.
넓은 유리창.
예쁜 옷들이 걸린 진열대.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자신.
가게 위에는 커다란 글씨로 적었다.
'서윤이네.'
그것은 열 살 소녀의 작은 상상이었다.
그러나 그 그림 속에는 훗날 서윤이 살아갈 삶의 한 조각이 이미 들어 있었다.
그 무렵 김씨 집안에는 또 다른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윤정애가 도현에게 말을 거는 일이 조금씩 늘어난 것이다.
“도현아, 밥 먹었니?”
“네.”
“학교 숙제는 다 했고?”
“네.”
“더운 데 너무 오래 있지 마라.”
도현은 어머니의 말을 들을 때마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아직 어머니가 편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갑자기 다정해지는 날이면 오히려 더 긴장했다.
다음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애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먼저 표정을 살피는 것을.
손을 뻗으면 몸이 굳어지는 것을.
그녀는 어느 날 도현에게 복숭아를 깎아주었다.
“먹어라.”
도현은 접시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정애는 아이 옆에 앉았다.
“도현아.”
“네.”
“요즘 학교는 어떠니?”
“괜찮아요.”
“친구들은?”
“있어요.”
정애는 잠시 망설였다.
“서윤이라는 아이하고도 잘 지내니?”
도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네.”
정애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 아이가 그렇게 좋으니?”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요.”
정애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도현이 자신 앞에서 저렇게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복숭아 한 조각을 접시에 더 놓아주었다.
“그렇구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애는 어렵게 물었다.
“도현아, 엄마한테 바라는 건 없니?”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 질문이 낯설었다.
그는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없어요.”
정애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정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바라는 것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 것일까.
정애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복숭아를 먹고 있었다.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아이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묻기 전에, 자신이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명숙은 어머니가 도현에게 복숭아를 깎아주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방문 앞에 서서 한참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부드러웠다.
도현도 조금 웃고 있었다.
명숙은 이상하게 마음이 쓰렸다.
어릴 때 자신도 어머니에게 복숭아를 깎아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늘 바빴다.
동생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집안 어른들의 눈치를 보느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명숙은 그런 어머니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현이 태어난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할아버지는 도현만 찾았다.
아버지는 도현의 성적을 자랑했다.
어머니는 도현을 미워했다.
명숙은 처음에는 어머니와 자신이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어머니마저 도현에게 다정해지고 있었다.
명숙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바카라상 앞에 앉았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서러움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누구한테 사랑받아야 하지?”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명숙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서랍 깊숙이 넣어둔 낡은 사진을 꺼냈다.
어릴 적 가족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할아버지 김만석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어린 도현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네 자매는 양옆에 서 있었다.
명숙은 사진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자신이 왜 울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진을 찍기 직전 할아버지가 도현을 안고 가운데로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명숙은 사진을 뒤집었다.
그리고 서랍을 닫았다.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미워하는 대상이 정말 도현인지.
아니면 자신을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았던 어른들인지.
8월 말.
서윤은 도현을 만나기 위해 감나무 아래로 갔다.
도현은 작은 의자에 앉아 바카라을 읽고 있었다.
“도현 오빠!”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아.”
서윤은 손에 든 공바카라을 펼쳤다.
“이거 봐.”
도현은 공바카라을 바라보았다.
작은 가게 그림이었다.
“뭐야?”
“내가 나중에 할 가게.”
도현은 그림을 자세히 살폈다.
“네 가게?”
“응.”
“무슨 가게인데?”
“옷도 팔고, 예쁜 물건도 팔고.”
서윤은 신이 나서 설명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와서 쉬어갈 수도 있는 가게.”
도현은 웃었다.
“그럼 가게가 엄청 커야겠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크게 할 거야.”
도현은 공바카라을 다시 바라보았다.
“좋겠다.”
서윤이 물었다.
“오빠는 나중에 뭐 할 거야?”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아직 모르겠어.”
“공부 잘하니까 선생님?”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의사?”
“그것도 모르겠어.”
서윤은 입술을 삐죽였다.
“오빠는 맨날 모른대.”
도현은 웃었다.
서윤은 그 옆에 앉았다.
“그럼 내가 정해줄까?”
“뭘?”
“오빠는 어려운 걸 쉽게 만드는 사람 해.”
도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직업인데?”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나도 몰라.”
두 아이는 함께 웃었다.
서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왜?”
“세상에는 어려운 일이 너무 많잖아.”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은 말을 이었다.
“엄마는 돈 버는 게 어렵고, 할머니는 몸이 아프고, 나는 수학이 어렵고.”
도현은 웃었다.
“수학은 내가 가르쳐주잖아.”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도현을 바라보았다.
“오빠는 어려운 걸 쉽게 만들어주잖아.”
도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준 것은 처음이었다.
집에서는 늘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일등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김씨 집안의 아들이니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도현은 공바카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
서윤은 웃었다.
“그럼 됐네.”
그녀는 공바카라을 덮었다.
“나중에 내가 가게 열면 오빠도 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
“꼭?”
“응.”
서윤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도현은 잠시 망설이다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두 아이는 웃었다.
그 약속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도현에게는 오래도록 기억될 말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이 있다는 것.
그곳에 가면 반갑게 맞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조금 덜 외롭게 느껴졌다.
그날 밤.
정순은 다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서윤은 어머니 옆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서윤아, 들어가 자.”
“안 졸려.”
“눈이 감기는데?”
“조금만 더 있을래.”
정순은 웃었다.
“왜?”
서윤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정순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딸을 바라보았다.
서윤은 졸린 눈으로 실타래를 잡고 있었다.
정순은 조용히 바늘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딸을 끌어안았다.
“엄마는 괜찮아.”
서윤은 어머니 품에 기대었다.
“맨날 괜찮대.”
정순은 웃었다.
“정말 괜찮으니까.”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것 같은데.”
정순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윤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따뜻한 손이었다.
“엄마.”
“응.”
“엄마도 하고 싶은 거 있어?”
정순은 잠시 생각했다.
그 질문을 받은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
젊은 시절에는 많았다.
예쁜 옷을 입고 싶었고, 여행도 가고 싶었다.
친구들과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을 건 가게를 열고 싶었다.
그러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림을 꾸리면서 그런 생각들은 조금씩 뒤로 밀렸다.
해야 할 일이 먼저였다.
하고 싶은 일은 늘 나중이었다.
정순은 딸을 바라보았다.
“있지.”
서윤의 눈이 커졌다.
“뭔데?”
정순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보고 싶다.”
서윤은 놀라 바라보았다.
“그게 꿈이야?”
정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서윤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내일 쉬어.”
정순은 웃었다.
“내일은 시장 가야지.”
“모레는?”
“모레도 일이 있지.”
서윤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럼 언제 쉬어?”
정순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윤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나중에 내가 꼭 쉬게 해줄게.”
정순은 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서윤아.”
“응.”
“그런데 엄마 때문에 네가 쉬지 못하는 사람은 되지 마라.”
서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순은 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네 삶을 전부 내어줄 필요는 없어.”
서윤은 이해하지 못했다.
정순은 말을 이었다.
“사람은 자기 몫의 행복도 남겨놓고 살아야 해.”
서윤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정순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그걸 조금 늦게 배웠나 보다.”
그날 밤 서윤은 어머니 품에서 잠들었다.
정순은 딸을 안고 한참 앉아 있었다.
바느질 상자에는 아직 꿰매지 못한 옷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바늘을 들지 않았다.
잠든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자신이 어떤 삶을 꿈꾸었던 사람인지 떠올렸다.
그녀는 단지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어머니이기 전에 이정순이라는 사람이었다.
웃고 싶을 때 웃고, 쉬고 싶을 때 쉬고, 사랑받고 싶을 때 사랑받고 싶은 여자였다.
그 사실을 잊고 산 세월이 길었다.
정순은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잊지 마라.”
창밖에서는 늦여름 바람이 불었다.
그날 밤 김도현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바카라상 앞에 앉아 서윤이 보여준 가게 그림을 떠올렸다.
그리고 공바카라을 펼쳤다.
'서윤이는 나중에 큰 가게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나는 아직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연필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줄을 더 적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도현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아직 구체적인 꿈이 없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자신이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김씨 집안의 아들이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처럼 외로운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바카라을 덮었다.
창밖에는 감나무가 서 있었다.
여름 내내 무성했던 잎 사이로 작은 감들이 자라고 있었다.
도현은 창문을 열었다.
멀리 황씨 집안의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서윤이는 아직 안 자나.”
그리고 조금 웃었다.
1980년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김씨 집안에서는 오래된 비밀이 여전히 감춰져 있었고, 박노식은 한연화의 행적을 찾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윤정애는 아이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자신이 만든 거리 앞에서 번번이 멈추었다.
명숙은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꼈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황씨 집안에서는 이정순이 밤마다 바느질을 했고, 전옥분은 그 곁에서 손녀의 미래를 걱정했다.
서윤은 작은 공바카라에 자신이 꿈꾸는 가게를 그렸다.
그리고 도현은 푸른색 공바카라에 자신의 마음을 적었다.
두 아이는 같은 골목에서 자랐다.
그러나 서로의 삶을 모두 알지는 못했다.
서윤은 도현이 얼마나 외로운지 알지 못했고, 도현은 서윤의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두 아이는 서로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곁에 있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두 아이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날 밤 이정순은 마지막 옷의 단추를 달고 바늘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오래 바라보았다.
거칠어진 손가락.
작은 상처들.
쉽게 지워지지 않는 바느질 자국.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계절은 바뀌는데 자신의 손은 언제나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봄에는 봄옷을 팔고, 여름에는 여름옷을 팔고, 가을에는 겨울을 준비했다.
겨울이 오면 다시 봄을 기다렸다.
그렇게 해마다 계절은 달라졌지만, 자신의 하루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순은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나도 쉬는 날이 있겠지.”
그 말은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이루지 못한 작은 꿈을 잊지 않기 위한 말이었다.
어머니의 손에는 계절이 없었다.
봄에도 일했고, 여름에도 일했고, 가을에도 일했고, 겨울에도 일했다.
그러나 그 손으로 길러낸 아이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계절이 자라고 있었다.
황서윤은 아직 몰랐다.
언젠가 자신도 어머니처럼 많은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때가 오더라도 그녀는 기억할 것이었다.
어머니가 늦은 밤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말을.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네 삶을 전부 내어줄 필요는 없어.'
그 말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서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삶의 어느 마루 끝에 홀로 앉아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날이 오면, 그녀는 비로소 어머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때는 자신에게도 말할 수 있기를.
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도 된다고.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