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박한 자본주의

취향이 아니라 과시를 입는 시대

byMickey



옷을 좋아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좋은 울을 손끝으로 만지고, 잘 만들어진 재킷의 어깨선을 바라보고, 실크가 빛을 받아 만들어내는 미묘한 색을 보는 일을 좋아합니다. 길을 걷다가 멋지게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한 번 더 바라봅니다. 그리고 가끔은 생각합니다. 그 분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오늘 정말 멋지시네요.”

저는 패션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것을 인정해주는 것. 어쩌면 옷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작고 우아한 인류애입니다.



가격표가 사람이 되는 순간

그런데 요즘 우리는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입었는가보다 얼마짜리를 입었는가를 먼저 봅니다. 어떤 색을 선택했고 어떻게 조합했는지보다 로고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살핍니다. 가방과 시계, 자동차와 집, 식당과 호텔은 어느새 취향을 설명하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등급을 설명하는 기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서로를 계산합니다.

저 사람은 얼마짜리를 입었을까. 어디에 살까. 무슨 차를 탈까. 어느 정도 벌까.

그렇게 사람보다 가격표를 먼저 읽습니다. 옷에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까지 가격표를 붙이기 시작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저는 그것을 ‘천박한 자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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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옷이 문제가 아니다

오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싼 옷을 입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좋은 캐시미어와 아름다운 실크, 숙련된 장인이 만든 구두와 오랜 시간을 들여 완성한 재킷에는 당연히 그에 맞는 값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옷을 좋아합니다.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아름다운 물건을 갖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아름다운 것을 욕망하는 마음은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가격이 아닙니다. 그 가격을 인간의 가치로 환산하려는 태도입니다. 100만 원짜리 재킷과 10만 원짜리 재킷 사이에는 분명 품질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입은 두 사람 사이에 90만 원어치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그 당연한 사실을 꽤 자주 잊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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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로운 계급장을 만들고 있다

한때 계급은 태어나면서 정해졌습니다. 오늘의 계급은 조금 더 세련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대놓고 신분을 묻지 않습니다. 대신 시계를 봅니다. 가방을 봅니다. 자동차를 보고, 사는 동네를 보고, 휴가를 어디로 가는지 봅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상대의 위치를 가늠합니다.

누군가는 비싼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이 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바라보며 자신이 아래에 있다고 느낍니다. 이보다 효율적인 계급제도가 또 있을까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우리는 스스로 경쟁하고, 스스로 비교하며, 스스로 열등해집니다. SNS는 그 계급장을 매일 광택 내어 보여줍니다.


무엇을 샀는지. 어디에서 먹었는지. 어디에서 잤는지. 무엇을 타고 있는지.

삶의 순간들은 점점 경험이 아니라 전시가 됩니다. 소비는 즐거움에서 증명이 되고, 취향은 점점 과시와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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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과 과시는 다르다

그래서 저는 ‘취향’이라는 말을 조금 조심해서 사용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의 소비를 취향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취향과 과시는 닮아 있으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취향은 아무도 보지 않아도 존재합니다. 과시는 누군가 봐주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브랜드를 알아보지 못해도 좋은 옷인가. 아무도 가격을 몰라도 여전히 갖고 싶은 물건인가. 사진을 찍어 올리지 않아도 그 식당에 가고 싶은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해도 그 시계를 차고 싶은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어디에서 왔는지 조금 더 솔직해집니다. 진짜 취향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조용하지만 오래 남습니다.



패션은 원래 경계를 허무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패션의 역사는 지금 우리가 만드는 계급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왔습니다. 귀족의 옷은 거리로 내려왔고, 노동자의 작업복은 런웨이에 올라갔습니다. 군인의 트렌치코트가 도시인의 옷이 되었고, 광부와 노동자가 입던 데님은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옷이 되었습니다. 스니커즈와 블루종, 치노팬츠와 필드 재킷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패션은 언제나 서로 다른 세계의 옷을 빌려왔고, 섞었고, 다시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패션은 본래 경계를 흐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옷으로 벽을 쌓고 있습니다.

더 희소한 것을 가진 사람. 더 비싼 것을 살 수 있는 사람. 남들이 쉽게 구하지 못하는 것을 가진 사람.

그것을 새로운 멋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희소함과 아름다움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비싸다는 사실과 아름답다는 사실도 같은 말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비싼 것을 가진 사람과 멋진 사람 역시 전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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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멋으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조금 다릅니다. 몇 년을 입어 자연스럽게 낡은 재킷을 자기답게 입는 사람. 비싸지 않은 셔츠라도 깨끗하게 다려 입는 사람. 유행보다 자신의 체형을 알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을 알고, 옷을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브랜드를 확인하기 전에 먼저 멋지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

저는 그런 사람이 멋있습니다. 패션은 타인을 압도하기 위해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보다 우월해 보이기 위해 입을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옷은 서로를 바라보게 만드는 아주 부드러운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길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의 아름다운 코트 한 벌 때문에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고, 누군가의 색 조합 하나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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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그 사람이 얼마를 버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슨 차를 타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더 비싼 것’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이제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도 좋겠습니다. 무엇을 가졌는지보다 어떻게 입었는지를 이야기하고, 가격을 묻기 전에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브랜드를 확인하기 전에 “멋지다”고 말하는 것. 비싼 옷을 입은 사람도, 오래된 옷을 입은 사람도 서로의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제가 바라는 새로운 패션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욕망합시다. 다만 그것을 사람의 등급표로 사용하지는 맙시다. 사람을 가격으로 읽는 일은 그만하고,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으면 합니다. 결국 멋이라는 것은 남보다 높은 곳에 서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조금 더 아름답게 바라보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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