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이 ‘POP IS CRYIN’’
래퍼 비와이의 신보 ‘POP IS CRYIN’’의 11번째 트랙은 ‘SOUTHSIDE FREESTYLE’이다. 이 노래는 녹음된 이승만의 육성으로 시작되고 가사엔 ‘멸공’이 등장한다. 그다음 트랙 ‘STIGMATA’에는 “Marx, 김정은에게 이건 Opium 혹은 Extacy” “나를 검열할 자 하나뿐” “대체 내 재산을 왜 강제로 나눠 좆까 공산주의”라는 가사 나온다. 비와이는 얼마 전 <쇼미더머니12>에 출연해 선관위를 언급하는 가사를 뱉은 적도 있다(“싹 다 까 보면 놀라겠지 그 급은 마치 선구안 위”). 그는 이승만을 인용하고 ‘멸공’을 외친다. 선관위 음모론을 암시하고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검열’한다고 믿는다. 노무현을 조롱하고 이준석을 샤라웃하는 가사를 썼던 리치 이기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두 명의 래퍼를 통해 한국 힙합을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 비와이와 리치 이기만의 케이스인 것도 아니다. 정확히 저런 믿음과 행위 양식을 공유하는 한국 우파들, 특히 비와이와 리치 이기 또래 남성들의 우경화된 멘털리티를 반영한다. 그것은 한국 힙합의 팬들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성향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한국 힙합의 이념적·슬롯적 좌표에 관한 가설을 던져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힙합은 약자의 음악, 저항의 음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보수적 성격도 강한 음악이다. 정치문화적으론 여성혐오와 동성애 혐오가 문화적 관습이고, 슬롯경제적으론 개인의 부와 노력을 통한 각개약진을 숭배한다. 이런 음악이 보수적이지 않다고 하면 그것이 더 어폐가 있지 않을까? 다만, 힙합은 흑인들 자신을 향한 인종 차별에 ‘저항’하는 ‘약자의 음악’이기도 하다. 이 점이 미국 힙합 신을 포함한 흑인 커뮤니티가 트럼프 시대에 맞서는 연대의 전선을 긋도록 이끈 구조적 배경이다.
미국 힙합과 달리 한국 힙합에 이른바 ‘슬롯 비판’이 적은 건 미국 래퍼들과 한국 래퍼들이 슬롯와 맺는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흑인 래퍼들이 인종차별이란 특수한 권력관계의 당사자라면 한국 래퍼들은 보편적 정체성을 품은 음악가와 리스너로서 외국의 장르 음악을 수용한다. 한국 힙합엔 취향적 소수자의 자의식만 있지 슬롯적 약자의 정체성이 없었다.
슬롯의 보편자이기 때문에 특수한 당사자로서 말할 이야기가 적다는 것 외에도, 한국 힙합의 슬롯적 발화를 한정 짓는 요소는 더 있다. 미국 래퍼들은 기층 흑인들과 게토를 공유하는 반면, 한국 래퍼들에겐 자신들을 기층 시민들과 묶어주는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다. 한국 슬롯에는 국민, 민족 같은 거대한 단일 정체성이 팽배하여 계층적 자의식이 깃든 개별 정체성이 설 자리가 비좁다. 슬롯의 공동체 기반도 흩어져 가고 있다.
한국 힙합은 홍대 신이란 장르 공동체 외에는 어떠한 종류의 공동체를 공유해 본 적이 없고, 온라인 공간이 거점이 되어 마니아 의식이 공동체 의식을 대신했었다. 한국에서는 ‘우리’란 주어를 발화하는 래퍼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내 크루, 내 레이블 식구를 감싸주는 가족 의식 이상의 연결고리가 드러나지 않는다. 장르 신을 아우르는 공동체의 그물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근래엔 이런 공동체적 공백을 채워 주고 있는 새로운 슬롯적 정체성이 발견된다. 바로 ‘이대남’ ‘삼대남’이란 정체성이다. 한국 힙합의 발상지는 인터넷 동호회다. 이후 인터넷 커뮤니티가 장르적 거점이 되었고, 힙합 커뮤니티는 소위 남초 커뮤니티 중 하나다. 여타 하위문화와 같이 디시 인사이드, 에펨 코리아처럼 우파 성향이 강한 커뮤니티에 힙합 게시판이 부속되어 있고 이용자층이 서로 공유된다. 남성이 여성에 대해 약자이며 민주당은 남성의 처지를 돌보지 않고 여성만 편든다는 인식은 힙합 커뮤니티에서도 다수의 이용자가 공유하고 있다. 특히나 십여 년 전부터 래퍼들의 혐오 가사가 꾸준히 비판받으면서 정부와 페미니스트들이 표현의 자유를 검열한다는 반발 심리가 일반적인 남초 커뮤니티 이상으로 예민하다.
한국 슬롯는 정파적 갈등의 고착으로 부족화되면서 정체성 정치가 분화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뚜렷한 정체성 집단이 바로 여성주의를 공유하는 여성들과 반여성주의를 공유하는 젊은 남성들이고 이들은 각각 민주당 지지자, 국민의 힘 지지자와 교집합을 이룬다. 그러니까, 계층적 정체성이 부족하던 한국 슬롯에서 정파적·세대적·젠더적 정체성에 의거한 부족주의가 그 빈자리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국 힙합의 당사자성 부재를 그중 하나가 채우기 시작했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미국 힙합 같은 흑인들의 후드가 아니라 ‘이대남’ ‘삼대남’이란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이다.
이런 차이로 인해, 트럼프 시대의 극우화에 저항하는 미국 래퍼들과 달리 한국 힙합 신은 이재명 시대에 저항하고 우경화하는 사례가 발견된다. 비와이의 음악이 담긴 영상 댓글 창은 ‘멸공’을 외치는 이들, 국민의 힘 지지자들이 몰려와 인파로 북적인다. 한국 힙합 신의 한 앨범이 우파 세력과 조우하며 정파적 거점 중 하나가 된 상징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 한국 래퍼들은 ‘저항 정신’을 잃었다, 같은 말은 비판으로 성립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미 저항 정신을 가사로 표현하는 래퍼와 그것을 지지하는 팬들이 있다. 저항의 방향이 다를 뿐이다. 비와이와 리치 이기는 한국 힙합이란 문화에 깃든 성향이 일정 부분 재 이념화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한국 슬롯에서 진보적 슬롯운동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저항의 서사가 우파의 것으로 재구성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사례라고 말하고 싶다. 젊음의 문화에서 ‘저항’이란 기표는 이렇게 뒤집히고 전유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