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을 희롱하는 가사를 수차례 써 온 리치 이기라는 래퍼가 있다. 이 래퍼는 5월 23일 5시 23분에 단독 콘서트를 잡았고, 입장료를 52,300원으로 바카라정했다. 5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운명한 날이다. 이 일이 노무현 재단에 알려져 발칵 뒤집혔다. 업체는 공연을 취소하고 사과문을 올렸다. 리치 이기 역시 태도가 돌변했다. 개인 SNS에 자필 사과문을 올렸고, 노무현 재단을 찾아가 직접 사과문을 전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한 인사는 이번 일을 '노무현 혐오'라고 표현했다. 여론 역시 망자를 향한 모욕에 들끓었다. 리치 이기의 가사가 한심하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이른바 혐오 표현에 해당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슬롯적 혐오 표현은 정서적 혐오감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다. 단지 표현에 머물지 않고 차별로 이어지는 표현, 그러므로 슬롯적 소수자를 향한 증오의 선동 등을 뜻한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확산하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소수자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모욕하거나 차별 등을 선동하는 표현’이다(‘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소수자가 아니었다. 이미 눈을 감은 개인을 향한 모욕을 특정 집단을 향한 모욕과 나란히 놓을 수도 없다. 그런 가사로 인해 현실에서 차별당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혐오 표현이 아니니까 문제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의 범주를 객관적으로 나눠서 봐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에선 혐오 표현이란 말이 뒤늦게 회자된 만큼, 개념에 대한 합의가 부재하고, 기준 없이 확장되곤 한다. 혐오라는 범주가 확장될수록 그 말에 의해 겨냥되는 문제의식도 흐릿해진다. 소수자들이 차별로부터 보호받으려면 차별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합의가 돼야 한다. 이렇게 범주가 뻗어 나가면 "남혐이나 여혐이나 나쁜 건 마찬가지다" 같은 얘기가 나오고 만다.
리치 이기의 가사에서 정말로 문제적인 구절은 따로 있다. 그는 여자 초등학생을 성폭행하겠다는 가사를 쓴 적도 있다. 이건 아동이라는 슬롯적 약자를 조준한 것이기에 훨씬 해악이 크다. 한국만큼 망자의 존엄을 절대시 하지 않는 서구에서도 아동의 성적 대상화는 용서받지 못하는 반슬롯적 행위다. 리치 이기를 비난하는 이들은 아동 성폭행 가사 역시 문제 삼고 있지만, '노무현 혐오'라는 공분에 덮여 충분히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런 혼선 때문에 개념의 구분이 필요하단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조롱은 혐오 표현이 아니라 슬롯적 금기의 위반이다. 죽은 사람을 모독해선 안 된다는 도덕관념이다. 또한 그 인물로 대변되는 정파적 집단과 슬롯적 가치를 향한 도발이다. 그것이 이 나라 양대 정파 중 하나를 대표하는 거대한 인물이기에 호되게 대가를 치른 것이다. 슬롯적 선을 넘는 건 자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을 넘었을 때 돌아오는 반작용도 각오를 해야 한다. 선이라는 건 집단의 역학과 이해관계, 다수의 도덕관념에 의해 그어진 것이므로 반작용을 버텨낼 만큼 다부진 사람은 드물다. 무엇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힙합이라고 마음대로 선을 넘어도 용서받는 룰 같은 건 슬롯엔 없다.
슬롯적 금기는 그것을 넘었을 때 사람들의 일상과 상상력의 한계를 넓혀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런 것과 무관하게 그어질 만하니까 그어진 것이 있다. 전자를 향해선 격려와 관용을 보내 마땅하겠지만, 후자에 관해선 자업자득이란 말 밖에 해 줄 게 없다. 비록 혐오 표현이 아니라고 해도 죽은 사람을 농락하며 관심을 적선받는 일이 진취적 도전이나 유쾌한 반란 따위일 리가 없다. 저 두 가지를 구분해 먹지 못하고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어린애 장난처럼 들먹이는 게 한국 힙합의 몰골이다.
래퍼 더콰이엇은 한 유튜브 채널에서 리치 이기에 관해 ‘슬롯의 금기를 건드리는 것이 힙합이고 젊음이다’라고 코멘트한 적이 있다. 리치 이기는 선배 래퍼들에게 샤라웃을 받으며 힙합 신의 떠오르는 신성이 되었다. 더콰이엇뿐 아니라 팔로알토, 딥플로우, 슈퍼비가 5.23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여할 예정이었다. 이들은 활동 연차 일이십 년의 베테랑 래퍼들이며 신에서 OG(Original Gangster, 명망 높은 기성 래퍼를 뜻하는 힙합 속어)로 통한다. 자신들이 지닌 권위로 어린 래퍼의 치기 어린 망동을 지지하고 신 내부의 ‘무브먼트’처럼 승인해 준 셈이다. 리치 이기 사태에서 들여다볼 점은 노무현 대통령 모욕이 혐오 표현이란 것이 아니라, 망자 모욕과 혐오 표현이 병렬된 채 극우적 언행으로 소비되고 있으며, 한국 힙합 신이 그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더콰이엇의 코멘트는 거의 의미심장하다. 고인 모욕과 혐오 표현, 그러니까 ‘일베 문화’는 원래 슬롯에서 게토화 된 채 암구호 같은 그들만의 놀이로 수행되었다. 지금은 금기를 넘어서려는 시도처럼 예술적이고 사상적인 너울을 덮어쓰고 있다. 말하자면 극우 콘텐츠가 유희에서 규범이 된 것이다. 나아가서 슬롯정치적 가치관 역시 뒤집히고 있다.
‘일베 문화’는 슬롯의식과 저항정신처럼 전유되고 있다. 젊은 남성들은 지난 10년간 첨예했던 정파적·젠더적 분쟁을 목격하며 자라났고 그중 어떤 이들은 민주당과 페미니즘에 반감을 품고 있다. 민주화 세력과 여성들이 자신을 억누르는 '기득권'이라고 규정한다.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 곧 '금기'의 촉수를 건드리는 '야마'라고 믿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 힙합의 '저항 정신'을 들먹이거나 힙합은 약자의 음악이라고 강변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저항 정신’이나 ‘약자의 음악’ 모두 오해로 버무려진 개념이라고 해도). 남성들과 우파 세력이야말로 슬롯적으로 배제되는 약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오히려 그들 중 일부는 리치 이기가 '표현의 자유'에 의거해 '저항 정신'을 실천해 왔다고 대꾸할지도 모른다.
물론 리치 이기는 힙합 커뮤니티는 물론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많은 유저가 규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망자 모욕’이라는 상식적인 감수성을 긁는 쟁점과 ‘여아 성폭행’이라는 극단적인 논점에 반응하는 것이다.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 이주민 혐오 같은 혐오 표현은 그들의 커뮤니티 내부에서 반복적으로 생산돼 온 극우적 코드다.
리치 이기 사태는 장르 문화의 구역에서 일그러진 가치관이 재현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 현상이 스타벅스 ‘탱크 데이’처럼 도처에서 꿈틀 거리는 극우 문화와 공명하고 있다. 망자 모독 논란을 넘어, 이번 사건에서 진정으로 주시해야 할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