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있는 호구

by안희정

호구. 요새 남편이 나를 호칭할 때 제일 자주 쓰는 말이다. 며칠 전에도 마트에 들렀다가 단골이니 특별히 5만 원짜리 문어를 3만 5천 원에 주겠다는 생선 판매대 사장님의 말에 냉큼 넘어간 나를 보고 남편은 또 호구 잡혔다며 혀를 찼다. 겉으로는 그런 게 아니라고 발끈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나는 호구 잡힌 게 아니라 스스로 호구존으로 들어갔다는 걸.


원래 호구(虎口)라는 말은 바둑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한다. 바둑돌 석 점이 둘러싸고 한쪽만이 트인 그 속이란 뜻이다. 지금은 남을 잘 믿고 순진하며, 쉽게 속고 당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은어가 되었다.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지만, 딱히 부인하지도 못하겠다. 이젠 마트에 갈 때마다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도 나를 발견하면 활짝 웃고 연신 ‘사모님!’을 외치며 인사하는 생선가게 사장님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더 강해질 뿐이다.


평소 귀가 얇아 남의 말에 쉽게 넘어가는 편이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으니 아마 타고난 성정에 가깝다고밖에 말하지 못하겠다. 이런 사람이라 때로는 자바카라하고 후회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그럴 수도 있다며 넘기는 편이다. 그걸 계속 곱씹다가는 나만 힘들기 때문이다.


내 그런 점을 딸이 점점 닮아가고 있다는 건 조금 걱정스럽기도 하다. 학교나 학원 선생님에게서 착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나, 친구를 만났을 때 돈을 더 냈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을 때는 혹여 남에게 이용당하지는 않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주관이 뚜렷한 아이로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러던 중 딸에게 작은 문제가 생겼다. 며칠 전부터 딸아이 휴대폰 액정 한가운데에 형광 줄이 그어져 화면이 갈라져 보였다. 수리 센터에 가니 23만 원이라는 수리 견적이 나왔다. 사용한 지 오래된 핸드폰이라 결국 새 걸로 사주기로 했다.


토요일 저녁 딸을 데리고 휴대폰 대리점에 갔는데 폐점 시간이 지나 이미 문이 닫혀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내일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요즘 휴대폰 시세는 어떻게 되는지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지만, 요금제니 공시지원금 같은 낯선 말들만 가득했고, 오직 혼란과 피로감만 느낄 뿐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딸이 말했다. “엄마나 나나 휴대폰 대리점에 가봤자 호구 잡힐 거야.” 그 말에 내 고민은 깊은 밤 달을 가린 구름처럼 막막해졌다. 그때 내내 잠자코 있던 남편이 우리를 불렀다. 곧 컴퓨터 화면에 우리가 사려고 염두에 둔 휴대폰과 몇 개의 다른 휴대폰을 띄웠다. 그리곤 요금제, 기깃값, 기타 추가 비용까지 조목조목 비교하며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이 사이트에서 이 휴대폰으로 선택하면 될 거야. 괜히 둘이 대리점에 가서 점원이 말하는 대로 고개만 끄덕이다 덜컥 계약하고 오지 말고 그냥 이렇게 결정하자.”


그렇게 말하는 남편의 눈이 자신감으로 빛났다. 바로 좋다고 말하고 주문하려는데 남편이 말렸다. 남편은 판매 사이트에 문의를 남겨놓은 게 있으니 답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보고 확실히 결정하자고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하는 말의 반도 못 알아들었지만, 적어도 남편이 휴대폰으로 나를 속일 사람은 아니니까. 남편에게는 호구를 잡혀도 상관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여전히 호구다. 하지만 적어도 나 대신 계산기를 두드려주는 세상 든든한 ‘백’이 바로 옆에 있으니 삶이 아주 불안하지만은 않다. 어쩌면 그게 우리 부부가 균형을 이루는 방식인지도. 이랬든 저랬든 오늘도 난 ‘그래, 그럼 그러자.’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 옆에서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딸을 보면서.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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