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은 일찍 해가 떴다. 밤새 내리던 장맛비가 그치고 새벽이 되면 푸른빛이 마을 곳곳에 파란 색감을 덧입혔다. 아직 해가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는데도 밤 그림자가 희미해져서, 담벼락과 전신주와 셔터 내린 세탁소가 묽게 탄 먹물로 그린 수묵화처럼 형상을 드러내는 시간이었다.
광수는 눈을 떴다. 이층 건물에서 반쯤 열어둔 창문 사이로 젖은 먼지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올해 고등학교 삼 학년인 그는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좋았다. 새벽의 세상은 마음을 들뜨게 하는 힘이 있었다. 부모님이 깰라 방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밖을 나서기 위해 옷을 입었다. 빨강 티셔츠에 주황 반바지를 입고, 왼쪽에는 파란색 양말, 오른쪽에는 노란색 양말을 신었다. 그는 무채색 옷이 싫었다. 튀지 않기 위해,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그런 옷을 입고는 그것을 단정 함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태도가 이 세상에서 색을 없애버렸다고 믿었다.
광수는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은 부모님의 가게다. 가게 간판은 부부닭강정이었다. 아버지가 튀기고 어머니가 양념을 묻히니 틀린 이름은 아니지만 그 이름이 창피했다. 이름이 일차원적이었다.
가게 옆을 돌아 건물 벽 앞에 놓인 자판기 쪽으로 걸어갔다. 몇 달 전부터 그는 자판기 커피 마시는 것에 취미를 붙였다. 광수가 태어난 날 놓였다는 그 자판기는 유행하던 시절이 다 지나서 이제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퇴물 신세였다. 위쪽 아크릴판은 누렇게 삭았고 버튼의 글씨는 옅게 흐려졌다. 그는 백 원짜리 두 개를 넣고 프림커피를 눌렀다. 동전이 기계 속으로 떨어지면서 철컹 소리가 났다. 종이컵이 툭 떨어지고 우윳빛 갈색 물줄기가 가늘게 내려앉는 동안, 자판기 안쪽에서는 늘 그렇듯 낮고 규칙적인 기계음이 났다.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음미했다. 크리미 한 커피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몸이 따뜻해졌다. 담배를 입에 물어본 적 없었지만, 하얀 김이 얼굴 앞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자 그 너머로 실눈을 뜬 자기 모습이 어쩐지 연기 속에서 조용히 판을 내려다보는 마피아 영화의 간부처럼 느껴졌다. 괜히 턱을 조금 치켜들고 컵을 입가에서 떼지 않았다.
그때 골목 저편 어둠 속에서 구두 굽이 아스팔트를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광수의 치켜들었던 턱이 내려갔다. 자신의 환상이 누구에게 들킨 것만 같아 귓불까지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커피가 넘치지 않게 컵을 가슴께로 끌어안은 채 자판기 옆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벽돌 모서리 너머로 눈만 내밀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길어지며 다가왔다. 위아래로 회색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 남자가 한 팔로 여자의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기대어 발을 끌었다. 세 걸음쯤 겨우 옮기고 나면 그 자리에 멈춰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남자가 등을 가만히 쓸어주면 다시 발을 떼었다. 그 느린 걸음 하나하나가 광수에게는 숨을 참고 지켜봐야 할 만큼 길게 느껴졌다.
여자의 목에는 얇은 스카프가 감겨 있었다. 새벽바람이 스카프 끝을 들어 올릴 때마다 그 아래 어깨가 드러났는데, 블라우스 천이 뼈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앙상해서 손으로 쥐면 나무젓가락처럼 똑 부러질 것만 같았다.
남자의 다른 손에는 플라스틱 이동장이 매달려 있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이동장이 무릎에 부딪혀 덜컥거렸고, 그 흔들림을 못 견디겠다는 듯 안에서 가늘고 긴 울음이 새어 나왔다. 자판기 불빛이 철망 틈을 훑고 지나가자 노란 줄무늬 털이 언뜻 드러났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숨었다. 광수는 담벼락에 등을 바짝 붙인 채 숨을 죽였다. 고양이 울음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귓가에서 울리는 것처럼 가까웠다. 새벽 네 시, 개도 짖지 않는 시각에 아픈 아내와 고양이를 한꺼번에 데리고 나온 사람이라니. 이 조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광수는 차가운 벽돌 모서리에 뺨을 대고 고개를 아주 조금 더 내밀었다. 두 사람은 자판기 앞에 멈춰 섰다. 광수를 보지 못했다.
"여보. 나는 진짜 안 할 거야."
쉰 목소리였다. 숨이 반쯤 새어 나가 말 끝이 흐려지며 바람에 흩어졌다. 광수는 담벼락에 붙인 귀를 저도 모르게 더 바짝 갖다 댔다. 이 새벽에, 이 몸으로, 도대체 뭘 안 하겠다는 걸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좀 앉자."
"진짜 안 할 거라고요."
“응, 알았어.”
여자가 몇 마디를 더 이었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끊겨서 광수는 그 말들을 끝내 붙잡지 못했다. 마지막 한마디만 또렷하게 남았다. 그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에요. 여자는 남자의 소매를 움켜쥔 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여자는 무너졌다. 여자의 고개가 남자의 팔꿈치 너머로 툭 젖혀졌다. 축 늘어진 팔이 허공에서 한 번 흔들리다 멈췄고 손끝이 아스팔트에 닿을락 말락 했다. 광수는 들이켜던 숨을 그대로 삼켰다. 남자가 털썩 주저앉아 여자를 무릎 위에 눕혔다. 손바닥으로 여자의 뺨을 감싸 쥐고 흔들었다.
"명희야. 명희야. 명희야."
대답은 없었다. 자판기의 웅웅 거리는 소리만 골목을 채웠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골목 끝 어둠 저편을 잠깐 바라보았다. 남자는 침착하게 움직였다.
남자가 이동장의 철망 문 걸쇠를 딸깍 풀었다. 노란 줄무늬 고양이가 머뭇거리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꼬리를 곧게 세운 채 익숙한 길을 걷는 걸음이었다. 남자가 그 뒷덜미를 한 손으로 움켜쥐어 들어 올리자 고양이는 저항 한 번 없이 네 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마치 이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초롱아. 이번에도 미안하다."
남자는 고양이를 한쪽 팔에 끼운 채 다른 손으로 양복 깃을 더듬었다. 깃 뒤편에서 작은 옷핀 하나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하더니 그의 손끝으로 옮겨 갔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핀 끝을 검지에 꾹 눌렀다. 살갗 위로 검붉은 핏방울이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남자는 그 손가락을 동전투입구에 가져가 은색 테두리를 따라 천천히 문질렀다. 피가 쇠에 번지며 가느다란 붉은 선을 그렸다. 이어 그는 잔돈 반환 레버를 잡아당겼다. 철컥. 레버가 제자리로 튕겨 돌아오는 소리가 새벽 골목에 또렷하게 울렸다. 철컥, 철컥. 광수는 저도 모르게 그 소리를 세고 있었다. 일곱 번째 철컥이 끝나자 골목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남자의 입술이 달싹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외는 듯 일정한 박자였지만 소리는 담벼락까지 닿지 않았다. 광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때 기계 안쪽 아주 깊은 데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딸랑. 딸랑딸랑. 오래 녹슨 놋쇠 방울이 바람도 없는 곳에서 저 혼자 우는 소리였다. 자판기 안에 그런 것이 들어 있을 리 없었다. 광수의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동전투입구의 쇠가 움찔했다. 은색 테두리 가장자리가 들뜨더니 마른 뱀 허물처럼 바스락거리며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갔다. 그 밑에서 시커먼 쇠가 숨을 쉬듯 부풀어 올랐다. 쇳덩이가 울퉁불퉁 솟구치며 형체를 갖췄다. 눈알 두 개가 툭 불거져 나왔고, 그 아래로 입이 귀밑까지 쩍 찢어졌다. 엄지손톱만 하던 구멍이 있던 자리에 이제 도깨비 얼굴 하나가 자판기 앞면에 박혀 골목을 노려보고 있었다.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축 늘어진 고양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그 찢어진 입가로 가만히 가져갔다. 고양이의 수염이 쇠 입술에 닿는 순간 무언가가 고양이를 안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노란 털이 한 줄기 빛처럼 늘어나며 그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철커덩, 동전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기계 속에서 둔탁하게 울렸다.
광수의 손에서 종이컵이 기울었다. 뜨거운 커피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는데도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남자가 무릎을 세우고 여자를 두 팔로 떠안았다. 축 늘어진 몸이 그의 품 안에서 이불 보따리처럼 접혔다. 그는 비틀거리지도 않고 몇 걸음을 옮겨 자판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커피가 나오는 배출구 바로 앞 아스팔트 위에 여자를 반듯하게 눕혔다. 머리를 받친 손을 맨 나중에 빼냈다. 두 다리가 가로등 불빛 아래 하얗게 드러났다.
남자가 일어서서 메뉴판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검지가 버튼들 위를 망설이듯 한 번 훑고 지나가더니 맨 윗줄 첫 번째 칸에 멈췄다. 밀크커피. 딸깍.
자판기 속에서 온갖 것이 한꺼번에 깨어났다. 모터가 윙 돌고, 톱니가 맞물려 드르륵 구르고, 어딘가에서 뜨거운 물이 쉭 끓어올랐다. 광수는 귀에 익은 다음 소리를 기다렸다. 종이컵이 툭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동전을 넣고 메뉴를 누른다. 광수가 날마다 새벽이면 이 앞에서 되풀이하는 순서였다. 단지 오늘은 그 동전이 조금 전까지 이동장 안에서 그르렁거리던 털북숭이였다.
배출구 안쪽 어둠에서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가 새어 나왔다. 형광등 빛도 가로등 빛도 아닌, 물 밑에서 올려다본 햇빛처럼 일렁이는 빛이었다. 빛은 여자의 정수리에 먼저 닿았다. 이마와 감긴 눈꺼풀과 스카프에 덮인 목을 지나, 뼈가 도드라진 어깨와 가슴 위를 느릿느릿 쓸어내렸다. 무릎을 지나 맨발의 발가락 끝까지 내려가는 동안 골목에는 모터 도는 소리 말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광수는 담벼락 모서리를 붙든 채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었다. 손등에 흘러내린 커피가 식어 끈적하게 들러붙는 것도 알지 못했다.
빛이 발끝에서 꺼졌다.
우당탕! 자판기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철판에 부딪히며 요란하게 굴렀다. 거스름돈 반환구의 덮개가 덜컥 젖혀지고, 노란 줄무늬 덩어리 하나가 그 좁은 구멍에서 튕기듯 쏟아져 나왔다. 고양이는 아스팔트 위에 네 발로 내려앉더니 털을 한 번 부르르 털었다.
고양이도 동전이 되는구나. 광수의 입술 사이로 아, 하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남자는 고양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여자 곁에 무릎을 꿇었다. 어깨를 감싸 쥐고 가만가만 흔들었다. 몇 번을 흔들었을 때 여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이 크게 한 번 부풀었다 가라앉았고, 여자는 남자의 팔에 기대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얼굴에는 여전히 핏기가 없었지만 남자의 소매를 붙잡은 손가락에 아까는 없던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부축해 자판기 옆 긴 의자에 앉혔다. 스카프를 바로 여며주고 나서야 그는 허리를 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담벼락 모서리에서 반쯤 몸을 내민 채 얼어붙어 있는 광수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어깨가 움찔 솟았다. 눈이 커졌다가, 그는 재빨리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소리 없는 그 몸짓이 골목 저편에서 광수에게 똑바로 날아와 박혔다.
새벽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그 바람을 타고 젖은 종이컵 냄새와 오래 묵은 자판기 커피의 달큼한 냄새가 두 사람 쪽에서 한꺼번에 밀려왔다. 광수는 코를 킁킁거리다가 제 손에 든 컵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뽑아 든 그 커피에서 나는 냄새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광수는 담벼락에서 한 발을 떼어 골목 한가운데로 나섰다. 다리가 후들거려 운동화 밑창이 아스팔트에 질질 끌렸다. 커피가 반쯤 쏟아진 종이컵을 여전히 쥔 채였다.
"아저씨. 제가 방금 본 게 뭐예요?"
그는 심호흡을 했다. 남자의 가슴이 한 번 크게 오르내렸고, 짧은 숨이 코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대답했다.
"커피 자판기지. 사람들이 매일 뽑아 마시는."
"아닌데요. 방금 고양이가 들어갔잖아요."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자판기 형광등이 지지직거리며 그의 회색 정장 어깨 위로 파르스름한 빛을 깜빡였다. 광수는 컵을 든 손으로 자판기를 가리켰다. 손끝이 떨려 남은 커피가 찰랑거렸다.
"이거 제가 태어날 때부터 여기 있던 거라고요. 근데 저런 건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래. 내가 그날 여기 세웠으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남자의 턱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방금 자기 입에서 무엇이 새어 나갔는지 그제야 알아챈 사람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시선이 광수에게서 미끄러져 자판기 쪽으로, 다시 발밑으로 떨어졌다.
긴 의자 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글쎄, 여보. 나는 안 한다니깐."
여자가 의자 등받이를 짚고 몸을 바로 세우고 있었다. 눈동자가 아직 초점을 다 찾지 못한 채 골목과 남편과 자판기 사이를 오갔다. 그녀의 눈길이 자판기 배출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거리에 흔한 자판기 하나를 보듯 아무 머뭇거림도 없었다.
여기서 뭘 또 안 한다는 걸까. 광수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 기울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아까부터 말했잖아요. 나는 안 한다고. 신발이나 주세요."
남자는 대꾸 없이 여자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등 뒤로 뻗은 손의 검지를 들어 광수를 향해 입술에 갖다 대는 시늉을 했다. 눈은 끝까지 아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 명희야, 우리 안 할 거야. 이 총각과 잠깐 이야기하고 집에 가자. 응?"
아주머니는 가게 앞, 손님을 위해 마련해 놓은 긴 의자에 앉았다. 앉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내리고 손으로 의자를 짚기까지, 사람이 앉는다는 단순한 동작이 저렇게 여러 개의 조각으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을 광수는 처음 알았다. 아주머니는 자리를 잡고 나서 자판기를 한참 쳐다보았다. 무서워하는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쉬워하는 눈에 가까웠고, 그 사실이 광수에게는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저씨는 광수를 가게 옆 전봇대로 데려갔다.
"오늘 본 건 잊어라."
"어떻게 잊어요. 고양이가 동전 구멍으로 들어가서 거스름돈 구멍으로 나왔는데."
"잠이 덜 깨서 헛것 본 거라고 생각해."
"저 네 시면 원래 깨요. 매일요."
아저씨가 광수를 째려보았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광수의 차림새로 시선을 옮겼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쓸데없이 호기심도 많구나. 게다가 사내자식이 옷이 그게 뭐냐. 정신 사납게 빨간색 티셔츠에 주황색 반바지를 입고."
"아저씨. 이건 그냥 빨간색, 주황색이 아니거든요. 스칼렛에 탠저린이거든요. 제가 이상한 게 아니라 아저씨 같은 사람이 문제예요. 아저씨야말로 유채색 학살자죠?"
"뭐라고?"
아저씨가 광수의 짝짝이 양말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가 얼굴을 들었다. 눈썹이 올라갔다.
"아저씨.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제 옷이 황당할까요, 커피 자판기로 사람을 살리는 아저씨가 황당할까요?”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아저씨는 어깨가 축 늘어졌다. 광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저씨, 그럼 죽은 개도 살릴 수 있어요?"
아저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고양이는 늙는 건가요?”
"지금은 더 이야기하는 것은 곤란하단다. 너도 보다시피 아내가 아프단다.”
아저씨는 타이르듯 말했다.
"이상하네요. 저런 게 가능한데 아주머니는 왜 아직 아프세요?"
아저씨는 한참 말이 없었다. 긴 의자에 앉은 아내 쪽을 한 번 보고, 다시 자판기를 한 번 보았다.
"넌, 사람이 다른 목숨에 함부로 손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쪽이니?"
“…….”
광수는 당장 대답하기 어려웠다.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평생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근데 지금 했잖아요."
아저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했지. 하지만 아주 조금만 했어."
"조금 하는 건 괜찮은 건가요?"
"아니, 괜찮은 건 아닌데, 아주 조금만 하는 거야. 조금만 하면 덜 괴롭거든. 그런 거 있잖아.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 태우는 담배, 한 모금만 하고 끊는 거지."
"아닌데요. 한 모금하다 보면 두 모금되고, 나중에 골초 되던데요."
"그래. 그렇긴 하지."
"그럼 저도 저기 들어가면요? 제가 다른 생명을 살릴 수도 있는 건가요?”
광수가 동전 넣는 자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아저씨의 얼굴이 굳었다. 그 시선이 아주 짧게 동전투입구로 갔다가 돌아왔다. 광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안 돼. 제발 그러지 마라. 너한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아니, 자꾸 이 사실이 퍼지면 이 세상이 안 좋아질 거야. 절대 하지 말고 잊어라."
아저씨는 광수에게 다짐을 받으리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광수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아저씨는 광수의 표정이 두려워졌다. 광수의 꽉 다문 입술은 꼭 일을 저지를 듯싶었다.
"절. 대. 안. 돼. 죽을 수도 있어."
아저씨의 고함이 새벽 골목을 찢었다. 어느 집 창문에서 불이 켜졌다가 다시 꺼졌다. 광수는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움찔했다. 그제야 아저씨는 아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다시 한번 뒤돌아 광수에게 다짐받듯 말했다.
"절대. 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아저씨는 아주머니를 부축하고 일어섰다. 두 사람은 골목 끝으로 향했다. 회색 정장의 등이 점점 멀어지다 없어졌다.
쳇. 어른들은 죄다 하지 마래. 이러쿵저러쿵 말 같지도 않은 이유 대면서. 자기들은 만날 하면서. 말하라고 해도, 안 해. 절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거야. 광수는 다짐했다. 이처럼 놀라운 발견은 오랫동안 비밀로 하고 싶었다. 이 좁은 동네에선 비밀이 거의 없었다. 예를 들면, 옆집에 누가 이사를 왔다거나, 누가 누구와 눈이 맞아서 도망쳤다는 은밀한 이야기는 하루가 지나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되었다. 이런 곳에서 들으면 기절초풍할 비밀, 두개골 열려서 영혼 탈출할 것 같은, 심장 박동수 300 찍고 제세동기 찾을 것 같은, 달팽이관 박살 나고 귓구멍 막힐 것 같은, 턱주가리 바닥에 박혀서 포클레인 불러야 할 것 같은, 동공 뒤집혀서 뇌수 구경할 것 같은, 멘털 액체화되어 하수구로 흘러갈 것 같은, 괄약근 풀리고 침샘 터질 이야기를 혼자만 안다는 건, 사실 최소 세 명이지만(고양이는 빼고), 짜릿한 일이었다. 다만 점점 커져가는 욕망, 막 저지르고 싶은 감정은 자기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광수는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셨다. 아까 조금 쏟아서 거의 남지도 않았다. 프림이 얇게 굳어 혀에 달라붙었다. 종이컵을 손으로 꽉 쥐어 구겼다. 가게 앞 스티로폼 상자 옆에는 골목 개 누렁이가 늘 그렇듯 엎드려 있었다. 열 살이 넘어 눈곱이 낀 채로 이제는 짖지도 않았다. 광수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있었으니 사람 나이로 치면 국민연금 수령하면서 틀니 닦을 시기다. 내년이나 그다음 해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광수는 종이컵을 든 채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너도 오래 살고 싶지?"
누렁이는 대답 대신 꼬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마침내 해가 떴다. 세탁소 셔터에 아침 햇발이 길게 눕는 동안, 광수는 손바닥에 남은 단내를 오래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