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과 검열에 대하여, 그리고 대한민국의 7월 7일을 내다보다
“나는 당신이 한 말을 혐오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그 말을 할 권리를 위하여 죽도록 싸울 것이다.” 이건 볼테르가 남긴 말이다. 정확히는 영국 작가 이블린 비어트리스 홀이 그의 저작 『볼테르의 친구들』에서 극적으로 그려낸 볼테르의 태도였다. 상대의 발언은 혐오하지만, 그 발언을 존중해주겠다는 그의 태도를 담고 있는 이 대사는 3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곳에서 회자가 되고 있다. 바로 볼테르의 이 대사가 인간의 사상적 자유와 언론출판의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볼테르는 과연 어떤 일을 겪었길래 이런 말을 남기게 된 것일까.
1758년 파리, 한 권의 바카라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클로드 아드리앵 엘베시우스의 『정신론』이었다. 인간에게 고귀한 영혼 따위는 없고, 성인과 범죄자의 차이도 타고난 것이 아니라 교육이 만든 우연일 뿐이며, 인간을 움직이는 유일한 힘은 신이 준 도덕이 아니라 자기 이익이라 선언한 바카라이었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사상은 프랑스의 신분제인 앙시앵 레짐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앙시앵 레짐 토대 위에 존재하던 절대왕정과 가톨릭 신앙은 『정신론』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공격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 논란에 소르본 대학 신학부와 파리 고등법원은 비상에 돌입했고, 교황청까지 움직였다.
1759년 1월 31일 교황 클레멘스 13세는 『정신론』을 인간의 영혼에 해롭다는 이유로 금서목록에 올렸다. 이어 소르본 신학부는 『정신론』을 이단적이며 불경한 명제로 단죄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리 고등법원은 세속의 칼을 빼들었다. 2월 6일, 『정신론』은 화형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파리의 사형집행인이 이 바카라을 불온서적들과 한데 모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당시 볼테르는 『정신론』을 지적으로 경멸했다. 이 바카라을 그저 잡동사니라고 불렀고, 엘베시우스의 사상은 독창성도 없다며 깎아내렸다. 하지만 볼테르는 『정신론』의 화형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탐구하는 계몽사상에 대한 단죄라고 파악했다. 즉, 그는 동의하지 않는 사상도 지켜져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나는 당신이 한 말을 혐오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그 말을 할 권리를 위하여 죽도록 싸울 것이다." 홀에 의해 만들어진 볼테르의 이 명언은 어떻게 3세기동안 인용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말이 '관용'이라는 개념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관용은 흔히 남용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동의하는 것을 지키는 일은 관용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취향이고 편애이며 변호이다. 관용이 시작되는 곳은 정확히 혐오의 지점이다. 내가 역겨워하는 말, 틀렸다고 확신하는 주장, 세상에 해롭다고 여겨지는 사상, 바로 혐오의 대상마저 포용할 수 있을 때 관용은 진짜 관용이 된다. 관용은 '네 말이 무조건 옳다'가 아닌, '네 말이 듣기 싫어도 우리 모두는 말할 자유가 있다'이다.
그래서 이 관용의 정신은 오늘날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를 갖는다. 그런데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우리는 모든 말이 무해하다고 믿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보는 거짓이며, 그 거짓은 누군가의 삶을 무너뜨린다. 어떤 사상은 위험하기까지 하며, 실제로 공동체에 해가 된다. 『정신론』을 불태운 자들도 스스로를 검열관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보호자라 여겼다. 신앙을 지키고, 슬롯의 도덕을 지키고, 순진한 영혼들이 위험한 사상에 물드는 것을 막는 수호자들이었다. 검열은 언제나 보호의 얼굴로 온다. 이것이 핵심이다. 역사상 어떤 검열도 '진실을 억압하기 위해' 진행되지 않았다. 모든 검열은 공동체를 혹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시작되었다.
슬롯가 관용의 정신으로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이 잘 지켜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자유에는 늘 바카라임이 따른다. 누군가의 자유가 공동체에 해가 되고, 누군가를 해치는 일이 되면 검열되어야만 한다. 건강한 슬롯는 이 자정작용을 여론이 한다. 슬롯 통념과 관습이 옳고 그름을 판별해 잘못된 자유를 바로잡는다. 하지만 어떤 자유는 슬롯의 자정작용을 초월한다. 『정신론』처럼 슬롯 통념과 관습을 깨는 사상들이 바로 그렇다. 이때는 여론이 아닌 국가가 개입해야만 한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권력을 이양 받았기에 그럴 권한이 있다. 권력은 결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 슬롯에 유익한가, 아니면 해로운가. 국민들은 자신들이 이양한 권력이기에, 국가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관용이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검열 또한 완벽하지 않다. 검열의 문제는 언제나 판별의 주체다. 애석한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검열의 기준은 국민에게 있지 않다. 누가 시대의 권력을 갖고 있는가, 누가 기득권층인가, 그리고 입법자들이 누구인가. 아무리 국민과 공동체를 위한다 검열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검열은 이 기준들에 의해 정해진다. 검열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억압된 사상의 목록이 아니라, 억압할 권한은 누구도 정의롭게 이용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지동설은 오랜 시간 부정되었고, 기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으며, 『정신론』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간의 지혜로 여겨지는 저작들은 대부분 금서였다.
검열은 관용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장치이며 동시에 자유를 침묵 시키는 도구이다.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까지 거짓의 목록에 슬며시 끼워 넣고 싶은 유혹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검열은 오늘 나의 적을 침묵시키는 도구로 이용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검열은 내일 나를 침묵시키는 도구가 된다. 칼자루를 쥔 손이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검열이 검열을 위한 검열이 아닌, 권력을 위한 검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건강한 검열이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권력자들의 사심이 개입되지 않는 검열이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검열은 결코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다시 관용의 문제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볼테르의 시선에서 잠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차례이다. 그는 엘베시우스가 틀렸다고 믿으면서도 그를 침묵시킬 권한만은 누구에게도-권력에게도- 주지 않으려 했다. "모든 의견은 동등하게 옳다"는 나태한 관용과, "나는 당신이 틀렸다고 확신하지만 당신의 입을 막지는 않겠다"는 볼테르의 관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후자는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판단할 권리와 침묵시킬 권력을 엄격히 구분할 뿐이다. 건강한 슬롯는 검열이 개입하지 않는다. 시대정신을 가진 여론은 언제나 공동체의 이익이 무엇인지, 어떤 의견이 '더' 옳은지 판별할 힘이 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힘이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날 권력에게 너무 많은 주권을 이양했는지도 모른다. 권력자들과, 입법자들에게 모든 주권을 주고 말았다. 그리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시대정신을 사유할 힘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건강한 슬롯는 시끄러워야 한다. 터무니없는 말과, 혐오스러운 사상이 나오더라도, 그들이 목소리를 낼 자유를 주어야 한다. 논쟁을 벌이고, 의견을 대립하며, 합의점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시대정신의 힘을 갖고 터무니없는 목소리를 이길 이성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하여 관용의 정신 위에 시대정신이 자정작용을 해야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이다. 상대를 침묵시키기 위한 검열은 시간이 지나면 나를 침묵시키기 위한 칼이 되어 돌아온다.
조지 오웰 역시 말했다. 자유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할 권리라고. 그가 두려워한 것은 국가의 검열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권력이 두려워 스스로 침묵하는 슬롯였다. 오히려 한 가지 의견밖에 없는 조용한 슬롯는 과두정의 형태로 기울어가는 징조이며, 독재국가의 전조이다. 자유가 권력자들과 입법자들의 기준으로 검열되고, 시대정신을 사유하는 의지를 잃어버린 슬롯는 점차 목소리를 잃어간다. 볼테르의 대사가 "나는 당신이 한 말을 혐오한다."에서 끝나버리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검열보다는 자유가, 혐오마저 함께하는 관용이,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별할 명석한 시대정신이 함께하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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