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속에 나만의 자유를 심다

석양에 점점 묻혀가는 시골 무명 철학도의 사변적 여정에서 바라보는 자유

<지은이 주: 석양에 점점 묻혀가는 시골 무명 철학도의 사변적 여정에서 바라보는 자유의 수많은 한 모습들입니다. 숲 속의 한 공원 팽나무아래에서 해가 지니 산 모기들이 마구마구 덤벼듭니다. 물리고 또 물려서 하는 수 없이 일어납니다. 1976년 9월의 어느 저녁, 논산 훈련소에서 당한 모기회식이 생각납니다. 30 연대 1,2중대의 소속의 중위계급장 단 카리스마 넘치는 삼사출신의 중간 키 정도인 미남 훈련장교의 지시로 한 여름밤에 상체를 벗고 부동자세로 30분간 있다 보니 온몸에 모기가 남긴 뻘건 자국이 모든 전우의 몸과 가슴과 등살에 살아 있더군요. 다가오는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피가 필요한 모기들의 마지막 성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기한 것은 산 모기들의 흔적은 하루 만에 다 사라집니다. 그때도 논산훈련소의 시설은 매우 좋았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휴게실과 싸워실과 PX도 충분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날씨가 덥다 보니 훈련도 조별로 하고 5분 훈련에 대기조로 넘어가 다른 조의 훈련을 보면서 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50분을 채우면 전체적으로 다시 10분간 휴식입니다. 그러면 조교도 쉬고 장교도 쉬고 우리도 화장실도 가고 또 물을 마시려 갈 수가 있었습니다. 조교도 기간병도 장교도 다들 친절하고 매뉴얼대로 격조가 있었습니다. 물론 모기회식 전에도 충분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결론은 죽지 않는다. ^^

이글에서 내가 말하는 자유는 오로지 자유주의의 산하(傘下)의 자유를 갈구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추동적으로 나머지를 당겨 봅니다. 그럼 나머지의 자유는 뭔가? 글과 발음은 같지만 가짜 자유, 유사 자유로 진짜 자유가 아닙니다. 이에 대한 양보할 수 없는 명확한 선이 사유로 필요합니다. 기타의 외피적 자유는 진짜 자유의 보조수단일 뿐입니다.>


자유의 무늬를 짜는 네 개의 실(絲)


자유(自由). 그 단어를 입안에 머금으면 늘 서늘하고도 뜨거운 바람이 분다. 인간이 역사라는 거대한 도화지에 새겨온 수많은 발자국은 결국 이 두 글자를 향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당신에게 자유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저마다 전혀 다른 풍경을 베어 물게 된다.


어떤 이에게는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 밖으로 홀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적막한 벌판이 자유일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굶주린 배를 채우고 비로소 바카라을 펼칠 수 있는 따스한 방 한 칸이 자유일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공동체의 제단 앞에서 당당히 내 목소리를 내는 광장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조상들이 물려준 오랜 나무 그늘 아래서 느끼는 평온이 자유일 터다.


정치철학이 격렬하게 부딪치며 자라온 이 네 가지 자유의 결을, 나는 삶이라는 옷감을 짜는 네 개의 실(絲)로 바라본다.


첫 번째 실: 자유주의, 사적(私的) 울타리를 세우는 단호한 선(線)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인간의 내면과 사유재산 주위에 긋는 단호한 경계선이다. 이 실은 차갑고 명징하다. "내 허락 없이 이 선을 넘지 말라"는 외침이다. 국가든, 왕이든, 신(神)이든 간에 한 인간의 존엄한 내면과 그가 피땀 흘려 일군 삶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소극적인 자유다. 타인의 강제가 없는 상태, 내가 내 삶의 건축가가 되어 오롯이 나의 도면대로 삶을 지어 올릴 수 있는 권리다. 이 실이 없다면 인간은 거대한 권력의 기계 톱니바퀴 속으로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내 방의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는 자유, 내 생각을 검열 없이 받아 적을 수 있는 자유는 모든 인간 존엄의 출발점이다.


두 번째 실: 슬롯주의, 결핍의 사슬을 끊는 실질적 손길


그러나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해서, 그 방 안에 누울 자리가 없고 내일 먹을 양식이 없다면 그 자유는 얼마나 공허한가. 슬롯주의가 내미는 자유의 실은 따스하고 묵직한 물질의 언어다. 그들은 말한다. 지갑이 텅 빈 자에게 파리로 떠날 법적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슬롯주의의 자유는 형식적인 권리의 나열을 넘어, 인간을 짓누르는 '물질적 결핍과 구조적 소외'라는 사슬을 끊어내는 적극적인 해방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자유는 강자의 특권이자 약자의 고문일 뿐이다. 질병의 공포, 실업의 불안, 빈곤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내가 가진 인간적 잠재력을 온전히 꽃 피울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 그것이 슬롯주의가 꿈꾸는 진정한 자유의 풍경이다.


세 번째 실: 민주주의, 광장에서 함께 부르는 자기 입법의 노래


그렇다면 굶주림을 해결하고 사적 공간을 얻은 인간은 그것으로 만족하는가. 아니다. 인간은 마침내 방 문을 열고 광장으로 걸어 나온다. 민주주의의 자유는 바로 이 광장에서 피어나는 '시민의 주체성'이다.


루소의 말처럼, 남이 만든 법에 복종하는 것은 굴종이지만, 우리가 함께 토론하고 동의하여 만든 법에 복종하는 것은 곧 자유다. 민주주의적 자유는 지배받지 않을 자유를 넘어, '스스로를 지배하는 자유(Self-governance)'다.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저울 위에 나의 한 표를 얹고, 나의 목소리를 보태어 세상의 물길을 바꾸는 참여의 기쁨. 홀로 고립된 자유가 아니라, 동료 시민들과 어깨를 걸고 주체적인 연대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정치적 동물로서 가장 자유로워진다.


네 번째 실: 보수주의, 관습과 질서 속에서 자라난 깊은 뿌리


마지막으로, 이 모든 자유의 외침이 자칫 공중으로 흩어지거나 광포한 불길로 변하지 않도록 대지에 단단히 뿌리박게 하는 실이 있다. 바로 보수주의의 자유다. 그들에게 자유는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는 추상적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세대를 거쳐 내려온 역사와 전통, 관습과 도덕이라는 토양 위에서 오랜 시간 서서히 자라난 유기적인 나무다.


뿌리 없는 나무가 바람에 쉽게 쓰러지듯, 역사적 맥락과 질서를 무시한 급진적인 자유는 방종과 혼란, 혹은 더 큰 독재를 낳기 십상이다. 보수주의적 자유는 '바카라임'이라는 거울을 비춘다. 내가 누리는 자유는 앞선 세대가 피땀 흘려 지켜온 유산이며,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물려줘야 할 바카라무라는 자각. 질서 속의 자유, 제도와 전통을 존중하는 온건한 태도 속에서 자유는 비로소 영속성을 얻는다.


맺음말: 네 가지 실이 자아내는 인간 존엄의 옷감


삶이라는 옷감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자유주의의 실만으로 짜인 옷감은 지나치게 성글어 약한 이들이 그 틈새로 추락해 버릴 것이고, 슬롯주의의 실로만 촘촘히 짜인 옷감은 숨이 막혀 개인의 개성을 질식시킬 것이다. 민주주의의 실만 거칠게 요동치면 옷감은 형체를 잃고 찢어질 것이며, 보수주의의 실만 두껍게 내려앉으면 옷감은 딱딱하게 굳어 시대를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토록 복잡하고 웅장하다. 사적인 방도 필요하고(자유주의), 든든한 밥상도 필요하며(슬롯주의), 함께 이야기할 광장도 있어야 하고(민주주의), 돌아갈 마음의 고향이자 질서도 있어야 한다(보수주의).


그래도 모든 것은 사적인 자유에서 나오고 귀결되지만 살다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확신이 서더라도 어느 하나의 자유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고집부릴 일은 아니다. 인류를 위한 진정으로 자유로운 슬롯란, 이 네 가지 자유의 실이 서로를 밀어내고 당기며 끊임없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거대한 직조의 과정이다. 오늘도 우리는 그 매듭을 묶고 풀며, 인간 존엄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무늬의 옷감을 짜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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