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장미 렌이 존경해 마지않은 대한민국의 인물 단사천

새하얀흑장미 렌이 실로 존경해 마지않은 대한민국의 큰 인물 단사천 어른

<본인이 존경하는 이유: 본인의 고희단상 시리즈 12편 이후를 보면 잘 나와 있다. 본인의 조부님(1905~1983)은 일제강점기에 대구에서 당시의 첨단상품거래소인 지물포(紙物鋪)를 운영하여 꽤 큰돈을 벌었다. 또 6·25 동란 때는 국군과 유엔군이 결사적으로 지키는 낙동강 전선의 아주 안전한 대구에서 전당포를 운영하여 떼돈을 축적했으나 조부님 본인 및 자식들의 말도 안 되는 부실로 3대인 나에게 오기도 전에 패가망신을 당하였다. 그 모든 부와 재물이 어디로 갔는지 통째로 사라졌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천운에 의해 많은 돈을 운 좋게 벌었지만 돈 흐름의 진짜 세계인 그 뿌리를 무시해서 바로 망한 꼴이다.

그에 비하여 단사천 이분은 황해도에서 단신으로 내려와 성공한 입지전적인 분으로, 한때 전(前) 대구 유명 재물주의 손자인 나로서는 존경해 마지않을 수가 없는 분이다. 이에 나의 한 지침으로 삼고자 본 내용을 각인한다. 혹여 필요한 분은 참조하여 주셨으면 한다. 하여튼 모든 거래의 기본은 신용과 정직이고, 뉴욕의 국제금융유대인처럼 일단 나의 가계에 들어온 모든 돈은 불필요하게 그저 밖으로 새지 않게 하는 것이라 여긴다. 기부를 하더라도 그 돈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 복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기부도 결코 할 필요가 없다는 그들의 가르침이 요긴하게 들린다.>


<1편: 단사천 본인>

1960~70년대 대한민국 경제 발전사에서 명동 사채왕 단사천(段泗川, 1914~2001) 회장을 '보이지 않는 은자(隱者)'이자 막후의 주역으로 긍정적으로 조명한다면, 그는 단순한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라 "제도권 금융이 부재했던 시대, 한국 기업들의 숨통을 틔워준 최후의 민간 중앙은행"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한계와 그의 역할을 경제학적·역사적 관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제도권 금융의 공백을 메운 '민간 구제금융원'

1960년대 한국은 1인당 GDP가 100달러 안팎에 불과했고, 국가 금융 시스템(은행)은 고도성장을 추진하는 대기업들의 자금 수요를 감당할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은행 문턱은 지나치게 높았고 가용한 자금도 태부족이었습니다. 이때 단사천은 압도적인 자금 동원력(하루 최대 수천 억 원 규모의 흐름 통제)을 바탕으로, 국가 기간산업을 일으키던 기업들이 일시적 자금 경색으로 도산할 위기에 처했을 때 '최후의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역할을 했습니다. 삼성의 이병철, 현대의 정주영 회장 등 한국을 일으킨 거목들이 위기 때마다 명동의 그를 찾았던 이유는 그가 사실상 국가가 하지 못하던 기업 구제금융의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2. '신용'과 '의리'의 지하 경제 고도화

사채 시장은 본질적으로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운 리스크가 큰 시장입니다. 단사천이 사채왕의 자리에 오르고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폭력이나 편법이 아닌 철저한 신용과 개성상인 특유의 정직함이었습니다. 그는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 탁월했으며, 한 번 맺은 신용은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의 이러한 양질의 자금 공급 메커니즘은 음성적 마피아 금융이 판치기 쉬운 지하 세계에서 '신용을 바탕으로 한 생산적 자금 순환 구조'를 정착시켰습니다. 즉, 투기나 약탈이 아니라 기업의 존속을 돕는 '투자형 사채'의 패러다임을 만든 것입니다.


3. 지상(地上)으로 올라온 자금, 산업 자본으로의 환원

그는 돈을 모으는 데만 집착한 수전노가 아니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정부의 사채 동결 조치(8·3 긴급경제조치) 등으로 시장의 판도가 바뀔 때, 그는 자신의 자금을 제도권으로 과감히 전환했습니다. 한국제지, 개양전기, 해성산업 등을 설립하며 스스로 제조업 및 산업 자본가로 변신하여 대한민국 기초 산업 발전에 직접 기여했습니다. 아울러 해성문화재단과 해성학원을 설립해 교육 자선 사업에 전 재산급의 부를 환원하는 등 부의 슬롯적 대물림과 인재 양성이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습니다.


4. 헌사: 보이지 않는 경제의 엔진

대중은 화려하게 빛나는 재벌 총수들과 한강의 기적이라는 겉모습만 기억합니다. 하지만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름을 치고 고압의 전류를 버텨주는 '절연체'와 '윤활유'가 필요합니다. 단사천은 대한민국 경제가 자금 고갈로 멈춰 서려할 때마다 묵묵히 사재를 털어 동맥경화를 뚫어준, '가장 차가운 시장에서 가장 뜨겁게 보국(報國)한 은둔의 영웅'으로 재평가받아 마땅합니다.


<2편: 단사천 님의 후손들 근황>

‘명동 사채왕’이자 ‘보이지 않는 경제 은자’로 불렸던 고(故) 단사천 회장이 타계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가 남긴 방대한 자산과 신용의 유산은 후손들에 의해 건실한 대기업 집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단사천 회장의 후손들은 과거의 음성적 사채업에서 완벽히 탈피해, 제도권의 견고한 중견그룹인 ‘해성그룹(Haesung Group)’을 일구어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후손들의 근황과 경영 현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2세대: 장남 단재완 회장 (은둔의 거부이자 그룹의 기틀 마련)

단사천 회장의 유일한 아들인 단재완(1947년생) 회장은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현금 자산과 부동산(강남 해성빌딩 등), 그리고 주요 계열사들을 모아 2014년 ‘해성그룹’을 공식 출범시켰습니다.

철저한 실속 경영: 부친의 성품을 이어받아 대외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은둔의 거부’ 스타일이지만, 경영 실적만큼은 매우 탄탄합니다. 한국제지, 계양전기, 해성산업 등을 이끌며 자산 수조 원 대의 그룹 기틀을 닦았습니다.

지주사 체제 완성: 2020년 그룹의 모태이자 부동산 관리 회사인 해성산업을 지주회사로 전환하며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정리했습니다.


2. 3세대: 장남 단우영 부회장 & 차남 단우준 사장 (형제 경영과 승계 본격화)

단사천 회장의 손자들이자 단재완 회장의 두 아들이 현재 그룹의 실질적인 전면에서 ‘3세 경영’을 펼치고 있습니다. 두 형제는 놀라울 정도로 닮은 꼴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습니다.

장남 단우영(1979년생) 해성그룹 부회장: 미국 존스홉킨스대 경제학과 졸업 후 삼일회계법인 컨설턴트를 거쳐 가업에 합류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사용지 브랜드 ‘밀크(MiLK)’를 성공적으로 론칭시킨 주역이기도 합니다. 현재 그룹 전반의 운영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차남 단우준(1981년생) 해성디에스 사장: 미국 터프츠대 경제학과 졸업 후 형과 마찬가지로 삼일회계법인을 거쳐 경영에 참여했습니다. 그룹의 핵심 미래 먹거리인 반도체 부품 계열사 ‘해성디에스’를 이끌고 있습니다.


3. 최근 근황: '삼부자 주식 맞교환'을 통한 본격적인 승계

최근 해성그룹 승계 구조에 정점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단재완 회장과 두 아들(단우영·단우준) 간에 대규모 지주사 지분 정리(블록딜 및 주식 맞교환)가 단행되었습니다. 3세 형제들이 계열사 지분을 정리하고 지주사인 해성산업의 지분을 똑같이 균등하게 높였습니다.

이는 형제간에 우열을 가리기보다, 철저하게 균형을 맞추어 ‘장남은 그룹 총괄 및 제지·부동산, 차남은 반도체·전장’ 등의 전문 분야를 나누어 맡는 안정적인 형제 공동 경영 체제를 굳힌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또한, 삼부자는 연세의료원 등 슬롯적 재단에 억대의 발전기부금을 꾸준히 전달하는 등 할아버지(단사천 회장)가 세운 해성문화재단·해성학원의 자선·육영 사업 기조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과거 명동을 쥐락펴락했던 단사천 회장의 지하 자금은 후손들에 의해 한국제지(제지), 계양전기(자동차 부품/공구), 해성디에스(반도체 서브스트레이트), 해성산업(자산관리/지주사) 등 철저하게 양지의 첨단 산업 자본이자 건실한 중견그룹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리스크 테이킹을 하지 않고 신용을 지켰던 단사천 회장의 유산이 후손들에게 아주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로 빛을 발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에 반해 본인의 경우 흔적도 없이 패가망신한 거부의 손자로서 실로 엄청난 존경심이 저절로 가는 단사천 님과 그 후계가족들입니다. 이 분들은 돈과 사업의 세계가 뭔지 실체로 아는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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