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는 또 다른 지식의 어떤 이야기인 고독에 대하여>
<지성과는 또 다른 지식의 어떤 이야기인 고독에 대하여>
(편집자 주: 고독의 근원은 성장기 때의 고군분투에서 온다고 본다. 불리한 위치에서 적자생존의 길을 걸어 본 자만의 이야기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고독을 다 느끼는 것은 아니다. 고독이 없는 인간들도 수타 많다. 고독의 바닥에는 고생을 당해 본 자로서 남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맘도 있다. 동반자로서의 맘이 아닌 자성적 고독으로 못다 한 자기 존재를 향한 내면의 자기 확신일 것이다. 이는 지성과는 분명히 다르다. 오히려 가깝다면 지식에 가깝다. 당한 삶과 아는 삶의 간격에서 영혼을 다친 자만이 고독할 뿐이다. 지성이 정신이라면 고독은 영혼이다. 지성보다 더 깊은 신에 대한 도덕적 도전이 고독으로 가는 길이다. 그 바탕은 자신의 뼈저린 과거이지만 그 수레바퀴는 지식인 것이다. 그래서 고독도 아무나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고독은 앎의 완성으로 지식으로 가는 길이다.)
인간은 대개 타인 속에서 살아가지만, 깊이 사유하는 이일수록 결국 자기 내면의 방 안으로 되돌아간다.
지식인의 삶에서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기본 상태에 가깝다. 몸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마음은 늘 질문을 품고 있으며, 정신은 끝내 혼자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은 공동체의 언어로 움직인다. 사람들은 함께 웃고, 함께 분노하며, 함께 시대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러나 지식인은 그 흐름 속에서도 끊임없이 “왜?”를 묻는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의 근거를 의심하고, 익숙한 가치의 뒤편을 들여다본다. 그 순간 그는 다수의 안락함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이해받기 어려운 질문은 결국 인간을 내면의 고독으로 이끈다.
특히 정신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단독자적이다.
철학자는 죽음과 자유를 혼자 사유해야 하고, 과학자는 아무도 믿지 않는 가설을 홀로 붙들어야 하며, 예술가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자기 내부에서 먼저 견뎌야 한다. 새로운 사상은 언제나 군중이 아니라 개인의 침묵 속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위대한 사유의 역사에는 언제나 긴 고독의 시간이 따라붙는다.
몸의 고독 또한 지식인의 숙명 가운데 하나다.
오랜 독서와 연구, 사색은 인간을 정적인 삶으로 이끈다. 타인과의 관계보다 바카라상과 기록, 사유와 관찰의 시간이 길어진다. 겉으로는 조용한 생활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서는 수많은 관념과 사상들이 충돌한다. 지식인의 고독은 텅 빈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생각으로 가득 찬 침묵이다.
마음의 고독은 더 깊다.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인간과 세계의 불완전함을 더욱 선명히 본다. 이상과 현실의 거리, 정의와 욕망의 충돌,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깨닫게 된다. 젊을 때는 지식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의 약함과 역사 반복의 비극을 보게 된다. 그때 지식인은 냉소와 체념 사이를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인간을 더욱 연민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식인의 고독은 단순한 슬롯적 고립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깊이 바라보는 자에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그림자와 같다. 많이 생각할수록 쉽게 확신할 수 없고, 많이 이해할수록 함부로 미워할 수 없으며, 많이 배울수록 자신의 무지를 더 크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진정한 지식인은 오히려 조용해지고, 겸허해지며, 때로는 세상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난 듯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바로 그 고독 때문에 인간 정신은 성장한다.
고독은 인간을 파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깊게 만든다. 혼자 견디는 시간 속에서 사람은 자기 욕망의 허위를 보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며, 삶의 본질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위대한 철학과 문학, 종교와 예술의 많은 부분은 결국 어떤 인간이 견뎌낸 깊은 고독의 기록이었다.
결국 지식인에게 고독은 피해야 할 불행이 아니라, 정신이 성숙해 가는 과정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몸은 홀로 앉아 있고, 마음은 시대와 인간을 고민하며, 정신은 끝내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그 침묵 속에서 비로소 자기 존재의 깊이를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