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ies about the Thucydides Trap>
<Stories about the Thucydides Trap>
사라진다는 중심에 대한 두려움이란 것이 있다.
바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다.
인간은 흔히 권력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권력 그 자체보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감각”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한 시대를 지배한 왕조가 몰락할 때,
오래된 기업이 신생 기술 기업에 밀려날 때,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할 때,
심지어 한 조직의 선배가 후배를 경계하기 시작할 때조차
그 깊은 곳에는 동일한 그림자가 숨어 있다.
“나는 이제 중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로 그 불안이다.
고대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원인을 인간의 욕망보다 두려움 속에서 보았다.
스파르타는 단지 아테네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아테네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시대가 끝날 수도 있다는 예감을 느꼈다.
어쩌면 인간은 패배보다 “시대의 교체”를 더 두려워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패배는 아직 싸우고 있다는 의미이지만,
시대의 교체는 자신이 더 이상 세계의 기준이 아니라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된 권력은 언제나 자신을 질서라 부른다.
그들은 안정과 전통과 바카라임을 말한다.
반면 새롭게 떠오르는 세력은 자유와 혁신과 변화를 외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양쪽 모두 스스로를 정의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기존 질서는 말한다.
“우리가 무너지면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새로운 세력은 말한다.
“저들이 사라져야 세상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정치는 전쟁이 되고
경제는 약탈이 되며
문화는 선전이 되고
도덕은 무기가 된다.
인간은 흔히 자신이 이성을 따라 행동한다고 믿지만,
실은 대부분의 충돌이 논리 이전의 감정에서 시작된다.
두려움.
그것도 단순한 생존의 두려움이 아니다.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한 시대의 지식인은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깊은 모욕감을 느낀다.
거대한 기업은 어느 날 차고에서 시작한 작은 기술 조직이 시장의 질서를 바꾸기 시작할 때 분노를 느낀다.
늙은 권력은 젊은 세대의 웃음소리 속에서 자기 시대의 종말을 듣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세력 역시 언젠가는 같은 공포를 품게 된다.
혁명은 결국 또 다른 질서를 만들고,
새로운 질서는 또 다른 젊은 변화를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인간 역사는 어쩌면 자유의 진보라기보다
중심의 교체 과정인지도 모른다.
누가 중심에 설 것인가.
누가 세계의 언어를 정의할 것인가.
누가 아름다움과 정의와 진실의 기준이 될 것인가.
그 투쟁이 문명의 역사 속에서 끝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철학은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던진다.
정말 인간은 중심이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어도 평온할 수 있다면,
자신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후배의 성장 속에서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세계의 연속성을 볼 수 있다면,
그는 비로소 권력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 있는 존재”로 남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늙어서도 자신의 시대를 놓질 못한다.
권력을 잃고도 영향력을 갈망한다.
이미 지나간 가치 위에 마지막 이름을 새기려 한다.
그것은 탐욕이라기보다
사라짐에 대한 공포에 더 가깝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결국 국가의 전쟁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영혼의 오래된 비극이다.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때마다
기존의 태양은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저물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에게 짙어오는 저녁의 황혼을 견디는 법을 좀처럼 배우질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