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기억과 망각, 존재의 유예, 시간의 침식)
<지은이 주: 철학적 존재에 대한 정신적 미학을 떠나서 빛바래지는 상흔에 대한 기다림의 망각으로 나 혼자만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의 그는 바로 허구적 가면을 쓴 제 자신입니다. 시(詩)나 소설의 모든 주인공은 지은이의 분신이랍니다.>
그는 빌라의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오후의 빛은 유리창에 닿으며 잔물결처럼 흔들렸다.
먼지 입자들이 그 빛 속을 떠다니고, 마치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고 있는 듯했다.
바카라상 위에는 다 마르지 않은 커피 잔, 나무 연필 하나, 지난 편지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 편지를 읽지도, 버리지도 않은 채 오랫동안 바카라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그 편지는 그가 한때 사랑했던 여자, 혜경이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가 그 편지를 본 지 4년이 지났다.
그녀는 떠났고,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홀로 남았다.
그는 그것이 기다림인지, 단순한 습관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 기억은 잔멸의 빛처럼 희미하게 퇴색하면서도 가슴에 더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어떤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스며드는 걸까."
그는 그 답을 찾기 위해, 하루하루를 견디듯 살았다.
그는 도시의 오래된 골목에서 살면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막노동은 이상하게 그에게 평화를 주었다.
막노동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와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러나 해가 질 무렵, 빛이 기울기 시작하면 언제나 같은 감각이 찾아왔다.
그녀가 떠나던 그날의 오후.
빛은 지금처럼 희미했고, 그녀는 편지로 글을 남겼다.
"기억이란 건 결국 자신이 허락한 만큼만 남는 거래요."
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도 모른다.
어느 날, 우연히 바카라장에서 혜경이의 오래된 사진을 보았다.
싱그러운 모습이었으나 이제는 그만둔 여운으로 남아 있다.
연이어 그녀를 담은 몇 장의 사진들이 맘속에서 스크린처럼 지나갔다.
빛이 바래고, 윤곽이 사라져 가는 오래된 초상들로 비추어 보였다.
그는 그 사진들 속에서 자신도 보았다.
“나도 저런 모습일지 모른다.”
오랜 세월 동안 희미해진 얼굴, 그러나 그대로 있는 잔상.
그날 밤 그는 사진을 바카라상 위에 올려두고 불을 끄지 않았다.
형체 없는 빛이 사진 위에 내려 꽂혔다.
그 빛이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잊는다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한때의 자신을 조용하게 빛 아래 두는 일이라는 것을.
그날 오랜만에 혜경이의 편지를 있는 그대로 또 보았다.
잉크는 이미 색을 잃었고, 종이는 누렇게 바랬다.
그러나 그 글자들은 여전한 빛을 보내며 살아 있었다.
"당신은 결국 나를 잊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건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의 시간을 살아가기 시작해서일 거예요."
그는 편지를 천천히 창문 사이로 흘러드는 빛에도 비추었다.
잉크의 잔흔이 빛 속에서 잠시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그는 아무 말 없이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아득한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자신을 붙잡고 있던 그림자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가슴으로는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조차 마음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창문 앞에 앉아 있으면 여전한 그 빛이,
마치 잔상처럼, 볼을 괴고 있는 그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그 빛은 더 이상 고통은 아니었다.
그것은 망각이 완성된 기억의 형태였다.
평온이었다.
그리곤 문득 알았다.
기다림의 끝에는 누군가가 오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던 자기 자신이 오는 것이라는 것을.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몸속에서도 빛은 여전히 바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 바람조차 첫 소녀 혜경이처럼 모든 것이 정신적으로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