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이지 않는다

by어슴푸레

무인 카페에 들러 진한 카페라테 한 잔을 따뜻하게 내려 공원을 향했다. 종일 흐린 날씨와 스산한 바람에 물기가 가득했다.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사위가 어둑어둑 밟혔다.


휴대폰을 켜고 '은아'를 검색했다. 10여 초 후 발신음이 멈췄다. 어! 언니! 잘 지냈어요? 네. 동생도 잘 지내고 있죠? 금세. 유학마을 마당에서 이야기하듯 현실감이 없어졌다.


예정대로라면. 그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삶은 숱한 변수와 작용과 인연에 따라 펼쳐지고 그려지는 것이기에. 그 말의 무용함을 알면서도 마음 한편이 쓸쓸했다.


예정대로라면 아직 고흥에 있었겠지. 예정대로라면 경신 샘과 현주 샘이 휴가를 내고 내려와 함께 여기저기 다녔겠지. 그도 아니면. 이 주. 은아네 아이들 수학여행 기간에 맞춰 ktx를 타고 내려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겠지.


-올라온 지 한 달 됐어요.

-정말로?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요?

-네. 19일에 올라왔으니까요. 여름 끝자락에 헤어졌는데 어느새 가을 마루에 있네요.


50여 분쯤 그곳에서의 일상을 전해듣는 동안 그 그림 속에 한데 있는 듯했다. 나날이 커 가는 배추와 선듯한 가을바람과 찬 몸을 덥히는 전기장판이 아른아른했다.


-더 추워지기 전에 한번 놀러갈게요.

-네 언니. 오세요.

-애들 없다고 대충 먹지 말고 잘 챙겨 먹고요.

-그럴게요.


빨간색 수화기 버튼을 누르자 띠딩.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저쪽의 세계가 돌연 신기루처럼 사라지자 이쪽의 세계가 제 모습대로 다시 움직였다.


현장 학습 신청을 하고 딸애와 다닌 벌교의 여기저기. 갤러리를 열어 한 장 한 장 넘기며 오래오래 머물렀다. 여름볕이 채 가시지 않아 덥다 못해 따갑던 오후의 중도방죽과. 111번 버스의 종점. 늙는다는 건 저런 건가. 쇠락한 모습에 처연함과 무상함이 가득했던 벌교 공용 버스 터미널. 글을 쓴다는 건 바카라임을 지는 거구나. 생에 던져진 질문과 자기 근원에 대한 물음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거구나. 보는 내내 압도된 조정래문학관. 왜 벌써 가세요, 더 쉬다 가시지. 잔을 가져다주자 만류하듯 인사하던 보성여관 여성 관리자님.

그리운 건 그리운 것. 제자리를 지켜야 하는 건 또 지켜야 하기에. 휴대폰을 닫고 에코백에서 <빛과 실>을 꺼내 읽는다. 한강 작가님의 글은. 너무 많은 진폭으로 울린다. 한 번씩 편두를 짚고 입속으로 그 문장들을 되뇐다.


이쪽을 향한 이후 저쪽은 바라보지 않는다. 이쪽에서 저쪽을 돌아보는 것은 이제 어떤 감정도 남기지 않는다. 단지 달라진 길에 아득함만 느낀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는다.


이 주 토요일 오전 11시 반. 그 여정 중 새로이 만날 세계에 노크하듯 발을 내디뎠다.


이제 나는. 망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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