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직선의 시간과 구원의 제국

기독교가 구축한 역사와 보편의 서사

by강훈

그리스인들이 끝없이 맴도는 운명의 바퀴를 관조하고, 인도 대륙의 현자들이 생과 사를 무한히 반복하는 윤회의 사슬을 끊기 위해 침묵 속으로 빠져있을 때, 인류의 시간 감각은 거대한 원(Circle) 안에 갇혀 있었다. 계절이 바뀌듯 문명도 흥망을 반복했고, 개인의 고통은 대자연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무심히 스러져가는 미미한 조각에 불과했다. 역사에는 궁극적인 종착지도, 인류 전체를 관통하는 뚜렷한 지향점도 없었다. 고대인들에게 시간이란 과거로 영원히 되돌아가거나 제자리를 맴도는 거대한 쳇바퀴에 지나지 않았다.

기독교는 이 아득한 순환의 고리를 깨뜨리고 ‘직선의 시간’이라는 전대미문의 역사관을 세계관의 중심에 놓았다.

기독교가 설계한 시간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오직 한 방향을 향해 날아간다. 우주에는 신의 주권적 결단으로 이루어진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절대적 출발점이 있었다. 이어 인간의 유한성과 자유의지가 초래한 '타락(Fall)'의 심연이 펼쳐졌고, 신이 직접 시공간의 무대 안으로 걸어 들어와 십자가에 매달린 '구원(Redemption)'이라는 대분기점을 지나, 마침내 세상의 모든 악과 눈물이 심판받고 우주가 완성에 이르는 '종말(Apocalypse)'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한다.

이것은 인류 사유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역사가 순환을 멈추고 직선이 되는 순간, 무의미한 자연의 반복 속에 흩어지던 개인의 삶은 우주적인 무게를 획득했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기에 인간이 내리는 매 순간의 도덕적 선택과 실존적 결단은 영원을 가르는 절대성을 띠게 되었다. 고통은 더 이상 맹목적인 자연의 폭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가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대한 드라마의 한 장(章)이자, 신의 원대한 구원 섭리 안에서 반드시 해석되어야 할 의미 있는 사건으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이 장엄한 직선의 드라마가 처음부터 로마의 대리석 궁전에서 울려 퍼진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가 태동한 실제 무대는 찬란한 신전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가장 어둡고 비참한 변방 유대와 갈릴리의 민중들 한가운데였다.

당대 지중해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의 평화(팍스 로마나)는 철저하게 군사력과 계급적 위계, 그리고 수백만 노예의 피땀 위에 세워진 거대한 피라미드와 같았다. 정복자의 발밑에서 패배자의 생명은 하찮은 목숨에 불과했고, 여성과 어린아이, 병자들은 체제의 효율성을 위해 소모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황제를 가리켜 온 세상의 구원자이자 절대 권력자인 ‘주님(Kyrios)’이라 칭송했다.

바로 그 폭력의 질서 한복판에서, 상식을 뒤엎는 파격적인 선언이 터져 나왔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청년 목수 예수가 전한 '하느님의 나라'의 복음이었다.

예수는 왕궁이나 신전의 권좌를 찾지 않았다. 그는 문둥병 환자의 썩어가는 살갗에 손을 얹었고, 슬롯적으로 매장당했던 세리와 창녀들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았으며, 율법의 이름으로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여인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 제국이 노예와 반역자를 처형하기 위해 고안해 낸 가장 치욕스럽고 잔혹한 형틀,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겨진 채 살점이 찢기며 숨을 거두었다.

제국은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로 반역의 불씨를 완벽하게 껐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파멸의 자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폭발적인 진앙이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하게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가 참된 주님이자 신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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