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원하신다” - 가슴에 붉은 십자가를 달고

11세기 십자군 운동

by모두를 위한 미술사

1071년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 튀르크에게 크게 패배했다. 이후 튀르크 세력은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차지했고, 비잔티움은 핵심 영토와 병력을 잃었다.


비잔티움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로마 교황에게 용병과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 시기 서유럽 지역은 교황과 세속 군주 사이에 권력 충돌이 격화되고 있었으며, 동일한 기독교 세계 내부에서도 영토와 이권을 둘러싼 무력 충돌이 빈번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요청을 받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서유럽 정세를 정리하고 교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 구원 요청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내세운 명목상의 최종 목표가 바로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프랑스 샹파뉴 지방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오도(Odo)였다. 랭스 대성당 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귀족으로서 보장된 출세길 대신 수도자의 길을 택했다. 클뤼니 수도원에 입회한 그는 엄격한 영성 훈련과 탁월한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2인자인 대수도원장에 올랐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가 주교 임명권을 갖던 관행을 뿌리뽑고자 강력한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교황은 클뤼니 수도원의 인재들을 로마로 불러들였고, 이때 오도 역시 로마로 호출되어 오스티아의 주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극단적으로 충돌했다.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치욕을 기억하고 있던 하인리히 4세는 로마를 침공하여 클레멘스 3세를 대립교황으로 세웠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로마에서 쫓겨나 1085년 망명지 살레르노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 사후 가톨릭 교회는 심각한 분열에 빠졌다. 후임인 빅토르 3세가 선출되었으나 대립교황 세력의 반격에 밀려 로마를 지속적으로 통치하지 못하고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와 황제파가 로마를 점령하고 있던 와중, 교황파 추기경들과 주교들은 로마 남쪽 테라치나에 모여 선거를 치러 만장일치로 오도를 교황에 선출했다. 그가 바로 우르바누스 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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