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해의 흔적 따라 오세암으로
지난 8월, 비를 맞으며 설악산 봉정암을 다녀왔다.
그때 오세암도 들러보고 싶었지만 봉정암을 왕복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정이었다.
결국 가을을 기약했고, 그때 여름 빗속의 내설악을 걸었으니 이번에는 단풍 물든 산길을 밟고 싶어 다시 길을 나섰다.
단풍 인파를 피하려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을 잡았다. 만해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고 길을 나섰다.
이른 아침 백담사 주차장은 이미 차들로 빽빽했다. 산사에서 밤을 보낸 이들과 새벽길을 서두른 이들이 뒤섞여 있었다.
백담사를 지나 곧장 오세암으로 향했다.
넓은 계곡 위로 아침 볕이 내리고, 산자락에는 이제 막 번지기 시작한 단풍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온 산이 타오르듯 붉지는 않았으나 맑고 선명했다.
설악산에는 가을이 막 내려앉고 있었다.
하산하는 이들과 어깨를 비켜 가며 한 시간 남짓 걸어 영시암에 닿았다. 거저 내어주는 차 한 잔을 들이켜며 가쁜 숨을 골랐다.
영시암에서 오세암으로 이어지는 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거리는 짧았으나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쉼 없이 발목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 풍경에 머물던 시선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소리에 갇혔고, 이마에서는 땀이 굵게 흘러내렸다.
그래도 고개를 들면 단풍이었다.
노란 잎 사이로 붉은 기운이 스며들고, 푸른 잎도 제 몫을 지키고 있었다. 가을이 한꺼번에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산자락을 타고 조금씩 번지고 있는 듯했다.
그 계절을 마주하려 다시 찾아온 길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발을 딛다 문득 생각했다.
수행이란 편안한 방에 앉아 마음을 비우는 일만은 아니겠구나.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무거워질수록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은 오히려 단순해졌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다음 발을 어디에 디뎌야 하는지만 남았다.
왜 옛사람들은 이렇게 깊은 산속에 암자를 지었을까.
먹고 자는 일부터 오가는 길까지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불편과 고단함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도 수행의 한 부분이었을지 모른다.
잠시 산길을 걷는 내가 그들의 삶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땀을 흘리며 오세암으로 향하다 보니, 왜 깊은 산속을 찾았는지 조금은 짐작해 보고 싶어졌다.
길섶 안내판에서 만해 한용운의 흔적을 만났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으로 알고 있던 한용운이 이곳에서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이 거친 산길을 걸으며 자신을 돌아보았을 한 수행자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전날 만해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낸 터라 그런지, 그가 걸었을 산길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바카라에서 읽었던 한 사람의 삶을, 그가 걸었을 길 위에서 다시 만나는 기분이었다.
단풍을 보러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걷다 보니 가을빛보다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깊은 산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았을 한 사람의 발자취였다.
산길에서는 이상하게 생각이 단순해진다.
숨이 차오르면 멀리 향하던 마음도 발 앞 한 걸음으로 돌아온다.
어쩌면 그 한 걸음씩 걷는 시간이, 내가 이 길을 다시 찾은 또 하나의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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