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을지연습 기간이었다. 을지연습은 전쟁 같은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를 가정해 매년 8월 정부 차원에서 실시하는 비상대비훈련이다. 을지연습하면 밤샘이 많이 떠오른다. 입사하고 7년 동안 지사 막내를 했다. 그렇다 보니 매년 훈련 때마다 야간 상황은 내 몫이었다. 날밤을 세우고 꾀죄죄한 몰골로 맞이한 다음날, 곧바로 집에 귀가한 것도 아니다. 일은 일대로 해야 해서 피곤에 찌든 상태로 낮근무를 마친 뒤에야 집에 갈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자기 근무 끝나면 교대하고 휴식하는 분위기다.
을지연습에는 적십자도 참여한다. 평시 적십자가 하고 있는 혈액사업, 의료사업, 구호사업은 전시 상황에서도 아주 중요한 업무다. 올해는 본사 소속으로 훈련에 참여했는데, 훈련이나 토의를 내내 지켜보면서 혈액의 중요성에 대해 더욱 생각하게 되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일상에서 혈액이 끊임없이 필요하듯이, 전쟁이 발발한다면 혈액은 무엇보다 중요한 자원이 된다. 군인이든, 일반인이든 전상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혈액은 더 많이 필요해진다.
전쟁과 혈액의 관계는 수혈과 응급치료 발전과 연결되어 있다. 전쟁은 적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혈액 확보와의 전쟁이기도 하다. 기사를 살펴보면, 태평양 전쟁 기간에 일본은 혈액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동물의 혈액이나 혈액형이 맞지 않는 혈액을 주입하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비윤리적 행위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수혈과 관련된 기술, 장비, 인력이 도입되었고, 6.25 전쟁 이후 수혈의 필요성에 눈을 떠 1954년 국립혈액원이 문을 열었다고 한다. 대한적십자사 혈액사업은 1958년 2월 국립혈액원을 인수해 개원하면서 시작하였다.
최근 사례를 봐도 혈액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2022년 2월 미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단서를 찾았다며 공개한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혈액 비축'이었다. 당시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흑해에서 전투 대비 태세를 날카롭게 가다듬고, 심지어 혈액까지 비축하고 있습니다. 짐을 싸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거라면, 이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라고 브리핑했다. 이밖에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쯤 되었을 때 국경 인근 지역에 혈액센터를 설립하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채혈을 시작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평화가 유지되는 안전한 나라가 되어야 하겠지만, 만일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발발한다고 가정하면 혈액은 얼마나 필요하게 될까?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참고할 만한 논문이 하나 눈에 보인다. 2025년 9월 9일 대한외상학회 학술지인 <Journal of Trauma and Injury>에 황건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와 박찬용 서울대학교병원 외상외과 교수가 공동으로 수행해 소개한 '북한의 남침 시 예상 혈액 저장 수요와 한국의 대비 수준'이라는 논문이 그것이다.
이 연구논문은 남북 무력충돌을 상정해 초기 2주 동안 필요한 혈액을 산출했다. 추정치로 계산했을 때 사상자는 약 8만 명에서 14만 명이 될 것이며, 이 중 군인은 30%, 민간인은 15%가 수혈 대기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중상자 한 명 당 평균 1.5 ~ 2.5리터의 혈액이 필요하다고 보면, 전쟁 발발 2주 안에 요구되는 혈액량은 36만 ~ 60만 리터가 된다는 거다. 불과 2주에 필요한 양이다. 한국의 실제 혈액 비축량이 약 10만 리터라고 하면 필요량의 5분의 1 수준에 해당하다는 분석이다.
현대전의 경우에는 전쟁의 종심은 국지가 아니라 전국이 될 수 있다. 국지전이 발발할 때 타 지역에서 헌혈에 공급한다는 개념이 아닐 수 있다. 지역별로 인근에서 혈액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치열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있다. 기존 헌혈자 만으로 수혈량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있을 텐데 신규 헌혈자와 혈액을 어떻게 확보하지? 전시에는 성분헌혈 보다 전혈이 중요할 텐데 전환이 잘 될까? 검사와 제제와 공급과 예산은 또 어떻게? 하는 고민들도 떠오른다.
총탄은 생산해서 장기간 보관할 수 있지만, 혈액은 유효기간이 있다. 적혈구는 35일, 혈소판은 5일이다. 혈액주기도 있다. 전혈은 한 번 채혈하면 8주가 지나야 한다. 모든 게 이 유효기한 내에 순환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헌혈자원이 충분히 대기하고 있을까? 저출산 고령화로 헌혈자원은 갈수록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헌혈에 참여하기도 쉽지 않다.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인 것 같다. 그만큼 대비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