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우리는 몇 안되는
중년 수강생들이었다.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함께 밥을 먹고,
가끔 주말엔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도 다녔다.
연수가 끝나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인연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가끔 안부를 묻고, 시간이 맞으면 만나고,
톡방에서는 여행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어느 날 이었다.
“일본 소도시 여행 가는 건 어때요?”
“좋아요.”
“열흘 정도?”
“오케이”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곧바로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예약했다.
누군가는 구글맵으로 동선을 찾고,
누군가는 식당을 예약하고,
누군가는 일정을 정리했다. 망설임도, 복잡한 의논도 없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불쑥 떠날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시간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건강이 있어야 하고,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있어야 하고,
낯선 도시에서도 휴대전화 하나로 길을 찾고,
숙소를 예약하고,
기차표를 예매할 수 있는 자신감도 있어야 했다.
예전에는 그런 일들이 젊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도 낯선 도시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여행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 늘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시간이 생기고, 경험이 쌓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만 있다면
오히려 이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자유가 생기기도 한다.
톡방에 오간 짧은 대화 몇 줄.
그 안에는 여행 약속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제든 마음이 움직이면 함께 떠날 수 있는
지금의 삶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날, 비행기표를 예매하면서
목적지보다 먼저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불쑥 떠날 수 있는 오늘이, 참 고맙다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