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 도착했을 무렵 함박눈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회색 하늘 아래 눈송이들은 끝없이 떨어졌고, 몇 안되는 사람들의 발자국은 금세 다시 눈으로 덮였다. 눈길을 걸을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발밑에서 울렸다.
삶은 멈추지 않는 여행이다.
그리고 싯타르타의 말씀처럼 떠남은 고통이지만, 그 여행의 필연적인 이치다.
밤이 되어 공항으로 향했다.
진눈깨비가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얼음판 같이 얼어붙은 도로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유리처럼 반짝였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서울정도로 미끄러웠다.
큰도로로 올려지자 미끄러움은 덜했지만, 차가운 밤이었다.
입국장 문이 열리고 일행들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모든 피로가 녹아내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는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보다 훨씬 깊고 따뜻하게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모두가 잠든 뒤.
숙소는 다시 조용해졌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병맥주 하나를 땄다. 병뚜껑을 따는 순간 짧은 금속음이 울렸다. 한 모금을 마시자 텁텁하고 씁쓸한 맛이 혀끝을 스쳐 목으로 넘어갔다.
이름도 모르는 독일 맥주였다.
그 맛은 오늘 하루의 감정과 닮아 있었다.
피곤함과 안도감.
성취감과 공허함.
따뜻함과 외로움.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조차 없는 밤이었지만 세상은 환했다.
눈이 도시 전체를 은은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바람은 잠들었고, 멀리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겨울밤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순간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눈은 차가웠지만 풍경은 따뜻했다.
그리고 그 따뜻함은 천천히 내 안으로 스며들어 긴 여행의 피로를 덮어주고 있었다.
오늘도 삶이라는 여행의 한 페이지가 지나간다.
프라하의 종소리, 드레스덴의 눈 내린 광장, 베를린의 빛나는 겨울밤.
그 모든 감각과 풍경들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일 것이다.
삶은 끝없이 쓰이고 지워지며 다시 완성되어 가는 한 편의 미완성 원고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원고의 다음 문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