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밤으로

by원성진 화가

다시 길 위에 섰다.

차는 부드럽게 국경을 넘어 체코를 향해 달렸다. 고속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풍경은 어느새 낯선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국경 근처의 휴게소에 잠시 차를 세웠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문틈으로 스며들어 얼굴을 스쳤고, 멀리서 갓 구운 빵 냄새와 진한 커피 향이 희미하게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고속도로 통행권을 인터넷으로 구매해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와 처음 접하는 시스템 앞에서 잠시 손끝이 머뭇거렸다. 화면 속 낯선 문자들은 미지의 길처럼 보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결제가 완료되자 작지만 분명한 안도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번져 나왔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삼키자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에 천천히 퍼졌다.

인간은 기술을 통제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길을 배우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배움은 언제나 낯섦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여행 역시 그렇다.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그렇게 쌓인 경험들은 조금씩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


체코의 국도로 접어들자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차창 너머로 펼쳐진 겨울 들판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다. 하얀 눈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언덕은 마치 세상이 흰 천으로 조용히 덮인 듯했다. 군데군데 놓인 작은 집들의 굴뚝에서는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 연기에서는 장작 타는 냄새가 상상 속에서조차 따뜻하게 느껴졌다.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타이어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이 모든 소리를 품어 안은 듯 세상은 놀라울 만큼 고요했다. 그 적막은 충만함에 가까웠다. 마을은 숨을 죽인 채 겨울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나 역시 그 침묵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눈밭 위를 밟는 발소리가 사각사각 귓가를 울렸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세상은 온통 흰빛 속에 잠겨 있었고, 침묵조차 하나의 음악처럼 들렸다.

“침묵은 모든 위대한 것들의 영원한 존재 방식이다.”

어디선가 읽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도 함께 눈 위에 내려앉은 듯했다. 움직이지 않는 풍경 속에서 오히려 존재의 깊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정적은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언어였다.


프라하에 도착한 것은 깊은 밤이었다.

도시는 이미 어둠 속으로 들어가 있었지만, 오래된 건축물들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더욱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노란빛은 석조 건물의 벽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마치 도시가 품고 있는 오래된 기억처럼 골목 사이를 흘러갔다.

눈 덮인 자갈길을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는 낮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차가운 공기에는 눈 냄새와 오래된 돌벽의 습기가 섞여 있었다. 때때로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빵 굽는 향기와 따뜻한 음식 냄새가 겨울밤의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늦은 시간 문을 연 식료품점에 들러 간단한 먹거리를 샀다. 따뜻한 빵 한 조각을 베어 물자 고소한 풍미가 입안 가득 퍼졌다. 여행지에서 먹는 소박한 음식은 언제나 예상보다 깊은 위로를 준다.


가게 문을 나서는 순간, 차가운 밤공기가 다시 얼굴을 감쌌다.

나는 잠시 멈춰 도시의 숨결을 들이마셨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도시는 인간을 부자이지만 외롭게 만들고, 자연은 가난하지만 자유롭게 한다.”

프라하의 밤거리를 걷는 동안 그 말은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다가왔다. 수많은 건물과 불빛 속에서도 인간은 종종 혼자가 된다. 그러나 어쩌면 자유란 본래 고독을 동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독이 없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는 자신만의 침묵을 견디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게 빛나는 도시였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사라지고 오직 감각만이 남았다. 발끝에 전해지는 눈길의 촉감,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오래된 도시의 향기, 차가운 공기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호흡의 온기.

찰나가 깊어질수록 영원은 가까워졌다.

어쩌면 예술도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순간 속에서 영원을 발견하는 일.


빈의 물길을 지나 린츠의 미래를 보았고, 프라하의 밤을 만났다. 그 여정 속에서 나는 수많은 풍경을 보았고, 수많은 소리를 들었으며, 낯선 공기의 냄새를 맡고, 새로운 맛을 경험하고, 차가운 바람과 눈의 감촉을 피부로 느꼈다.

여행이 남기는 가장 깊은 흔적은 그 풍경 앞에서 변화한 자기 자신이다.

결국 모든 여행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순환이다. 물론, 낯선 길과 우연한 만남, 침묵과 사유가 조금씩 변화된 나 일 것이다.

여정은 계속된다.

그리고 이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간 모든 순간들은 앞으로도 긴 시간 동안 내 안에서 조용히 흐를 것이다.

삶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끝없이 덧쓰이고 수정되며 완성되어 가는, 한 편의 아름다운 미완성 원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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