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서른 살

서른을 건너뛴 서른한 살의 도주 일지

by김지연

내가 작년에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난 스물여덟 살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스물여덟이라고 했고 진짜로 스물여덟 살이었다, 만으로.


나는 네덜란드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거기서 자전거를 사가지고 그걸 타고 한국까지 돌아가겠다고 마음먹고 먼 길을 가고 있는 이방인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집으로 초대해서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워줬고 이야기를 들어줬다.


근데 올해 나는 서른 하나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혹은 오랜만에 만나서 니가 올해 몇 살이더라? 묻는 친지들에게 나는 서른하나라고 했고 진짜로 서른하나다, 한국나이로.


나는 그렇게 서른 살이었던 적이 없는 서른한 살이 되었다.


어제는 8년째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랑 등산을 다녀왔고 그제는 친구가 낳은 갓난아기를 보러 가려고 백일해 예방접종을 맞았다.


오늘은 누룽지통닭집에서 내일모레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는 친구를 배웅하기 위해 셋이 모였다.


식욕이 너무 없어서 회사에서 주는 식비로 밥은 안 먹고 매일 로또를 사던 애였다. 아무래도 당첨된 적은 없어서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했다. 영어를 잘 못해서 챗지피티한테 농장이나 공장에 취직할 수 있는 이력서 초안을 써달라고 했더니 취직처의 특성에 맞춰 '스트롱 스태미나'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 얘기를 하는 친구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스트롱 스태미나와는 거리가 멀잖아..."


아무튼 걔의 목표는 2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2억을 모아 오는 거였다. 2년 후에도 아직 여러 나라들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지원할 수 있는 나이라서 그 후에는 캐나다로 가서 또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할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최종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가 돼야 부자인데?"

"글쎄, 그냥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거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게 부자 아닐까?"

"근데 너는 물욕도 없고 식욕도 없잖아"

"그래, 이루지 못할 꿈은 아닌 거 같은데"


우리는 걔가 돈을 얼마나 모아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지 헤아려봤다. 물욕도 식욕도 없는 그 애가 100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앞으로 70년을 스스로 먹여 살려야 한다. 소박한 그 친구의 행복한 삶은 한 달에 100만 원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았다.


"1년에 천이백만 원, 8억 4천만 원이 있으면 되나?"

"야, 나이 들면 병원비 필요하잖아. 넉넉하게 세 번 정도 크게 아파서 이천만 원씩 나간다고 치고 육천만 원 더 해서 9억으로 하자."

"근데 2030년 이전에 AI가 인류를 파멸시킬 거래. 앤트로픽 연구원이 그랬어."

"젠슨 황은 아니래. 더 살아야 해"

"근데 해수면 높이 상승세가 예측을 뛰어넘었다던데."

"난 그것보다 외국인이 말 거는 게 너무 무서워."

"뭐?"


말 그대로 내일모레 출국하는데 외국에서 외국인이 말을 걸까 봐 무섭다니. 영어학원에서 과거시제까지 배우고 귀찮아져서 때려치웠다는 친구가 외국에 가서 맞닥뜨릴 현실이 적잖이 걱정됐다. 근데 걔는 일본어를 모르는 상태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어로 소통이 되는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돌아온 친구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만의 방식으로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 가는 길엔 전기 킥보드를 빌렸다.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왔을 때쯤, 인도가 좁아 잠깐 차도를 지나가는데 어떤 차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나는 아주 갓길 쪽으로 바짝 붙어서 지나가고 있었던 데다 차도는 넉넉했고, 아파트 단지 내였으므로 경적이 울릴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깜짝 놀라서 갓길에 멈춘 나도 약간 신경질이 나서 지나가는 차 뒷모습에 대고 주먹감자를 쳐들었다.


"엿이나 잡숴"


그 차가 정차하고 아저씨가 내려서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백미러로 나를 본 아저씨가 약이 올랐는지 차 문도 안 닫고 나에게 걸어왔다. 아, 초딩도 아니고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는 잠시, '아저씨는 도보고 나는 킥보드'라는 생각이 스친다. 나는 운전 10년 경력자답게 수려하게 유턴하여 최대 시속 20km/h로 아파트 단지 안으로 도망갔다. 아저씨는 차를 돌려 나를 따라오는 듯했지만 난 차단기를 지나 단지 안 인도로 들어왔기에 아저씨가 어디까지 따라왔는지는 모르겠다. 인도 안으로 들어가서 야무지게 반납까지 하고 뛰어서 집으로 들어왔다. 귀에서 심장 소리가 둥둥둥둥 울렸다.


이십 대 초반 즈음에 친구와 나눈 편지에 친구는 찬란할 우리의 서른 살, 마흔 살이 기대된다고 했다. 서른한 살의 나는 운전실력을 킥보드 타고 도망치는 데 쓰고 있다. 전세사기 이후로 제대로 된 집을 못 찾고 여기저기를 전전하고, 안부를 물을 때마다 거취가 달라지는 사람이었다. 이제 우리의 마흔 살, 쉰 살이 기대된다고 편지할 사람도 없고 그런 막연한 기대조차도 없어졌지만, 어쩐지 서른다섯의 나, 마흔의 나는 스무 살 무렵 상상하던 서른의 나보다는 선명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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