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숲길> - 시적 언어와 예술

비일상성, 알레테이아

3c9c17e2b150e8ecf0654e7b04618266.jpg

모든 예술이 그 본질에 있어 시 짓기라고 한다면, 건축예술과 회화예술 그리고 음악예술은 시(Poésie)로 환원되어야 한다. - 하이데거, <숲길> 중에서 -


‘여기 문이 있다’,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어야지’ 뭐 이런 의식의 흐름으로 문을 열진 않잖아. 그런데 문짝이 갤러리에 전시되면 그것이 ‘문’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것. 일상성 속에서는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용어로 ‘존재망각’ 상태. 반면 예술 안에서의 비일상성은 사물의 본질을 지시한다. 이게 알레테이아 개념이다.


기억하지는 않아도 지워지지가 않아요.

슬픔 뒤 밀려드는 그리움.


관심 채널이 <유머1번지>에서 <가요톱텐>으로 넘어가던 초등학교 시절, 장혜리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의 저 가사가 그렇게 좋았다. 수사(修辭) 개념을 이해하게 된 첫 경험이었던 것 같다.


언어의 기능, 단어가 지닌 정보의 전달을 위한 사례인 것만은 아니잖아. 멜로디까지 더해진 맥락 속에서 그 단어들이 지시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삼 느끼게 하는, 언어의 본질을 지시하는 경우. 시적 언어란 이런 것. 그런 의미에서 예술성을 대변하는 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현대 미술도 그렇지만 현대 시도 난해하지?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언어의 본질을 지시하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흘러간 옛 유행가의 가사만도 못한 경우가 분명 있지.

건축가 유현준 교수의 설명으로는, 건축에서 美란 대개 구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란다. 글에서도 마찬가지지. 단어들이 지닌 의미를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맥락 안에서의 기교여야지, 기교에 치중하다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 문장으로 미끄러지도록 자기 미학이라고 고집하는 분들이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망각’ 개념은 개인의 실존적 각성과도 관련 있는 내용이다. 문의 도구 본질은 열리는 것일까? 닫히는 것일까? 자신이 ‘문’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의 기능이 해방인지 굴레인지부터가 판단불가인 상태이기에, 문을 앞에 두고도 소통이 되지 않는 것 아닐까?

8.jpg
작가의 이전글그것이 알고 싶다 - 참교육과 시한폭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