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
...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며,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간결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를테면 나는 세 가지의 시간을 본다. 그렇다. 고백컨대 세 가지가 있다.” 물론 이러한 직관과 고백은 모든 분석의 현상학적 핵심을 구성한다. 그러나 '고백한다'는, '보다'와 결합됨으로써 그러한 직관이 어떤 논쟁의 결론인지를 보여준다. ... -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중에서 -
사상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철학의 거점이지만, 철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인용되는 그의 사유는 시간에 관한 것이다. 시간은 물리적 단위일까? 변화와 변동을 지각하는 의식의 흐름일까?
칸트의 ‘물자체’,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적 개념을 사물에 투영해 사물을 이해한다. 시간도 그러하다. 베르그송을 빌리자면 개인에게서 지속되는 것들을 투영한 결과다. 하여 회상은 ‘순수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니며, 기대 또한 ‘순수 미래’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의미화되지 않는 시간은 기억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 리쾨르는 이 지속성을 ‘이야기’라고 말하는 거야.
과거는 지금 그가 살아가는 이야기로 기억하는 ‘이제까지 살아온 이야기’다.
미래는 그가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로 기다리는 ‘이제부터 살아갈 이야기’다.
니체는 모든 시제가 현재적이라 말한다. 과거조차 결정(決定)된 시간이 아니다.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結晶)되어 가는 시간이다. 그 결과, 때로 기억이 변한다. 먼 훗날 오해를 벗어난 순간에야 그 의도가 다시 보이듯 말이다. 미래가 궁금한가? 지금을 살아가는 모습의 결과이지 않겠어? 그 미래에도 이러고 있을 공산이 크고...
하여 지금 눈앞에 스쳐가는 순간의 성격을 바꿀 때, 시간의 결도 바뀌는 것. 그러나 여간해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 것도 현실. 그런 인생방정식을 하이데거는 ‘존재’라고 말했던 것. 그 인식의 토대는 각자가 겪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