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오디션

광고를 대충 읽으면 생기는 일

by연두


대학교 1학년 5월의 일이다. 학교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고 아르바이트를 해볼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이 되면 패스트푸드점에서 유니폼을 입고 일해보고 싶다는 로망도 있었다.


막상 알아보니 학교 앞 KFC나 버거킹의 시급은 1500원 정도였다. 카페도 많이 받아야 2000원. 스무 살의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수업이 끝난 뒤 다섯 시간쯤 일한다고 해도 만 원을 벌기 어려웠다. 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날 잡지 모델 오디션 광고를 봤다. 지원 조건은 ‘키 170cm 이상, 밝고 건강한 여성분 환영.’ 그게 전부였다. 처음 들어보는 잡지였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 눈에 들어온 건 따로 있었다.

‘촬영료 세 시간에 십만 원. 추후 경력이 쌓이면 시급 인상, 인센티브 제공’

세 시간에 십만 원이라니. 학교 앞 카페에서 며칠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모델 오디션이니 잘 꾸미고 가야 할 것 같았다. 화장을 제대로 할 줄 몰라 기숙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에게 부탁했다.

“언니, 나 화장 좀 해줘.”


평소 늘 뽀얗고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다니던 언니는 자기와 똑같이 화장을 해줬다.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어른스러워 보이는 흰 블라우스에 평소 잘 입지 않던 검은색 짧은 치마도 꺼내 입었다. 거울을 보니 제법 괜찮아 보였다.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30분 넘게 가는 동안 그저 설렜다. 벌써 십만 원을 어디에 쓸지 생각했다.

“친구들과 이대 앞에 가서 머리를 할까? 아냐, 그래도 처음 번 돈이니 엄마에게 먼저 드리는 게 낫지.”


합격 여부보다 십만 원의 지출 계획이 먼저 정해졌다.


오디션 장소는 실내체육관이었다. 한쪽에는 키가 큰 흰색 파티션이 늘어서 있었고 그 앞에는 바카라상들이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 지원자가 많았다. 나 같은 또래도 있었고 더 어려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진하게 화장하고 멋지게 차려입어 이미 모델처럼 보이는 여자들도 있었다.


스태프가 서너 명씩 이름을 불렀다. 자기소개를 하고 몇 가지 질문에 답한 뒤 일렬로 걸어보라고 했다. 모델처럼 걷는 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최대한 똑바로 걸었다.


그다음은 피팅이었다. 내가 받은 옷은 검은색 실크 같은 재질로, 손수건만 하게 접혀 있었다. 피팅룸에 들어가 펼쳐봤는데 뭔가 이상했다. 다 펼쳤는데도 너무 작았다. 아무리 봐도 이 안에 내 몸이 다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상의밖에 없었다. 옷을 몇 번이나 뒤집어보다 결국 스태프에게 물었다.

“저기요,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여기 옷이 뭐가 빠진 것 같은데요.”

“이거 맞아요. 이렇게 입으시는 거예요.”


스태프가 샘플 사진을 보여줬다. 하의가 없는 게 아니었다. 그 작은 천조각 하나로 상의와 하의를 모두 해결하는 옷이었다. 검은색 레이스가 달린 초미니드레스였다.


잠깐 당황했지만 여기는 모델을 뽑는 곳이었다. 촌스럽게 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모델이라면 이런 옷도 입는 건가 보다 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다른 여자들의 옷은 더했다. 가슴이 깊게 파인 옷도 있었고 등이 훤히 드러난 옷,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옷도 있었다. 그걸 보니 그나마 내 옷이 양호해 보였다. 그렇다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치마가 올라가 속옷이 보일 것 같았다.


파티션 안으로 들어가자 심사위원들은 돌아보라고도 하고, 앉아보라고도 하고, 걸어보라고도 했다. 나는 치마가 올라가지 않게 신경 쓰느라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나중엔 하는 시늉만 했다. 아무래도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잠시 뒤 발표된 1차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얼떨떨했지만 기뻤다. 수상한 오디션에서 예상 밖으로 합격했는데도 나는 오디션을 의심하지 않고 내 가능성을 발견했다.


1차에서 뽑힌 사람은 열 명 정도였다. 우리는 별도의 사무실로 이동했고, 그곳에는 30~4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너 명 앉아 있었다. 다시 자기소개를 하고 얼굴을 확인한 뒤 2차 피팅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긴 행거에 걸린 옷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직접 고르라고 했다.


마음에 드는 옷은 없었다. 그나마 덜 부담스러워 보이는 것을 골랐다. 가느다란 끈이 달린 뷔스티에 형태의 상의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랩스커트였다. 첫 번째 옷보다는 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입어보니 치마가 훤히 비쳤다. 이건 아무리 봐도 옷보다 속옷에 가까웠다. 그제야 기분이 이상해졌다.

‘여기 뭐 하는 데지?’


여기 더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간다고 해도 되는 건지,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혹시 못 나가게 하면 어떡하는지 걱정됐다. 지원서에 학교 이름까지 적어낸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다시 내가 입고 왔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에게 쏠렸다. 다른 지원자들은 이미 속옷에 가까운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저 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저희 엄마가 갑자기 연락이 와서요. 죄송합니다."


그 말을 하고 바로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고 나서도 한동안 정신없이 걸었다. 아까 내렸던 버스정류장까지 지나쳐버렸다.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한참 가다 보니 공중전화가 보였다. 친한 선배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선배의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설명하자 선배가 말했다.

“너 진짜 멍청하다. 그런 데를 왜 가냐. 그거 성인잡지잖아.”


그러고 보니 광고에 '성인들을 위한 어쩌고'라는 말이 있었다. 성인이 그 성인일 줄이야. 스무 살의 나에게 ‘성인’은 주민등록증이 나오고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단어가 야한 잡지와 연결되기에는 내 머릿속 거리가 너무 멀었다. 반면 ‘세 시간에 십만 원’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읽자마자 이해했고, 버스에 타자마자 지출 계획까지 세웠다.


선배가 나를 데리러 왔다. 함께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에도 손이 떨렸다. 안도감이 들면서 갑자기 서러워졌다. 엄마 생각이 났다. 올 때만 해도 십만 원을 벌면 엄마에게 드릴까 생각했는데. 돌아가는 길에는 그 돈에 혹해서 거기까지 찾아간 내가 한심하고 창피했다.


덕분에 세상에는 큰 글씨보다 작은 글씨에 중요한 내용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스무 살에 배웠다. 그 뒤로 계약서를 받으면 깨알 같은 조항까지 읽고, 이용약관에서 ‘동의’를 누를 때도 조건을 한 번 더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사람이 큰일을 한번 겪으면 역시 배우는 게 있다.


물론 그 교훈이 늘 작동하는 건 아니다. 호텔을 예약할 때는 최저가가 그렇게 잘 보이면서 ‘환불 불가’는 결제하고 나서 보인다. 쇼핑몰에서는 ‘40% 할인’에 눈이 먼저 가고 배송비 3천 원은 마지막 결제창에서 만난다. 카드 혜택도 ‘최대 5만 원 캐시백’까지는 시력이 아주 좋다가 전월 실적과 제외 항목부터 눈이 침침해진다. 여행상품도 ‘29만 9천 원’은 정확히 읽으면서 유류할증료와 현지 선택 관광이 불포함이라는 사실은 한참 뒤에 발견한다.


스무 살 때는 ‘성인을 위한’을 못 보고 ‘세 시간에 십만 원’만 봤다. 그때 그렇게 이불킥을 해놓고 아직도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본다니 사람은 참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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