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보다 가치는 더 고결한가?

ABC론을 넘어

by아레테 클래식

한때 나는 유시민 작가를 좋아했다. 그의 글을 읽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고, 복잡한 정치와 슬롯의 문제를 비교적 명료한 언어로 설명하는 그의 능력에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순간에도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먼저 이해하려고 했다. 최근 그가 이재명 정부와 여권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설명하면서 이른바 ‘ABC론’을 제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시민은 2026년 3월 방송에서 지지층과 정치적 행위자를 가치와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A·B·C로 나누어 설명했고, 이후 자신의 분류가 이미 존재하는 갈등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고 설명했다.


그가 정치적 갈등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의 동기를 들여다보려 했다는 점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이유로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람은 신념과 가치 때문에 정치에 참여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활과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한다. 또 실제 정치에서는 가치와 이익이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기보다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유시민 역시 자신의 ABC론에서 A를 가치 추구 중심, B를 이익 추구 중심, C를 그 교집합으로 설명했고, 이후에는 B가 일반 유권자보다 정치인이나 정치적 스피커를 가리킨다는 지적이 일견 맞다고 인정했다. 따라서 ABC론을 처음부터 악의적인 의도로 사람들을 편 가르기 위한 주장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이야기를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유는 유시민이라는 개인의 의도가 아니라 ‘가치’와 ‘이익’이라는 두 단어가 인간의 정치적 동기를 설명하는 순간 만들어내는 묘한 위계 때문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익보다 가치를 더 고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처럼 보이는 반면,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신념과 원칙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정말 가치는 이익보다 본질적으로 고결한 것일까. 나는 바로 이 질문에서 ABC론을 조금 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가치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가치를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옳고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가치 역시 인간의 욕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순수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옳다고 판단하는지, 무엇을 용납할 수 없는지에는 내가 살아온 경험과 욕망, 두려움과 상처, 소속감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치는 각자의 심층적인 소유욕이나 욕망이 의식의 언어를 빌려 표현되는 하나의 방식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가치가 위선이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넘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가치도 있고, 종교적 신앙이나 예술적 아름다움처럼 직접적인 소유와 지배의 욕망으로 환원하기 어려운 가치도 있다. 문제는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가진 가치가 언제나 나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믿는 순간이다. 가치가 나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기준이 아니라 타인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순간, 가치는 다른 얼굴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가치의 언어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존재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것만 보는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실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실도 달라진다. 결국 가치가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창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가 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창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그리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을 세계의 전부라고 믿게 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서도 이 문제는 반복된다. 레비스트로스와 사르트르의 역사 인식에 관한 논쟁을 떠올려보면,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 역시 단순히 과거에 존재했던 사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다. 어떤 사건을 선택하고 어떤 사실을 중요하게 다루며 어떤 맥락 속에 배치할 것인지는 역사 인식의 주체가 가진 관점과 문제의식에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사실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역시 이념과 가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순수한 거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로 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반대의 방향으로 더 멀리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사실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내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실제로 확인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가진 가치와 관점에 의해 선택된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실증주의가 강조해 온 객관적 검증의 태도는 그래서 여전히 중요하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 전체를 오직 물증과 측정 가능한 자료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역시 남는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사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할 때 CCTV와 블랙박스라는 물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경험과 기억, 정황에 대한 심증 역시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에게는 크게 두 종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지키고 싶은 이념이나 가치를 위해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비교적 분명하다. 더 어려운 문제는 자신이 특정한 색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누구보다 진실을 보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편견은 자신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편견인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업장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도 있고,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관점에서는 우리가 의식하기 이전에 이미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잠재적이고 암묵적인 층위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이들이 가리키는 중요한 지점에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이미 어떤 조건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가치관을 갖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가치관이 자신의 시야를 어떻게 제한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BC론의 한계는 A·B·C 가운데 어느 유형이 더 낫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복잡한 동기를 가치와 이익이라는 두 개의 범주로 설명하는 순간, 그 가치와 이익을 선택하고 있는 인간 자체의 복잡성을 놓칠 수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의 정치적 선택에는 가치와 이익뿐 아니라 경험과 소속감, 두려움과 기대, 기억과 관계, 정보와 무지, 그리고 개인의 삶에서 비롯된 수많은 감정이 함께 작용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특정 정바카라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정의와 공공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순수한 가치 때문에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가치가 자신의 경험과 욕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을 수도 있다.


더구나 가치와 이익은 서로 적대적인 두 영역도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에 따라 무엇을 이익이라고 판단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이익과 손실을 통해 가치관을 형성하기도 한다. 노동의 경험이 공정이라는 가치를 만들기도 하고, 공동체에서 받은 도움의 경험이 연대라는 가치를 만들기도 한다. 반대로 특정한 가치가 개인에게 어떤 선택을 이익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가치와 이익을 서로 대립하는 두 항으로 놓기보다, 둘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 사람의 판단을 구성하는지를 살펴보는 편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더 가까울 것이다.


무엇보다 정치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가치가 없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만이 세계의 진실이라고 믿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순간 인간은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상대방이 왜 틀렸는지를 증명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다. 그 과정에서 상대의 말 가운데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지워지고, 상대를 규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장면만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선택된 사실들이 다시 나의 확신을 강화하면서 하나의 폐쇄적인 세계가 만들어진다. 가치가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그 창이 감옥의 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유시민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종교와 비종교, 어느 집단에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다. 자신이 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행동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고, 상대방의 행동은 그 가치에 비추어 더욱 엄격하게 판단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가치의 언어는 어느 순간 타인을 배제하는 언어가 된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타인을 이해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치에는 반드시 반가치의 가능성이 함께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를 지키려는 열망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할 수도 있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타인을 끊임없이 심판하는 독선으로 변할 수도 있다. 공동체를 지키려는 마음이 외부인을 배척하는 배타성으로 변할 수도 있으며, 인간을 사랑한다는 명분이 정작 눈앞의 한 인간을 미워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가치가 언제나 선한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가치가 만들어낼 수 있는 반대의 결과를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치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가진 가치가 어떤 반가치를 낳고 있는지를 더 엄격하게 살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ABC론에 하나의 알파벳을 더하고 싶다. 그것은 D, Doubt, 의심이다. 여기서 의심은 상대방을 의심하라는 뜻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가치와 판단을 의심하는 태도다.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가 정말 나의 욕망과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지, 내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정말 사실 자체인지, 그리고 내가 타인을 비판할 때 혹시 나의 가치라는 이름으로 나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가치가 인간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되기 위해서는 가치 자체보다 가치에 대한 성찰이 먼저 필요하다.


어쩌면 정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가치가 없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자신이 지키는 가치가 너무나 순수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의심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다. 순수한 가치를 지키려는 의지가 맹렬해질수록 그 가치를 훼손한다고 여겨지는 타자를 배척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비난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때 가치의 언어는 타인을 향한 혐오와 적대의 언어로 변하고, 자신이 지키려 했던 가치의 이름으로 오히려 배타적 독선이라는 반가치를 만들어낸다. 순수성을 지키려는 열망이 지나치게 강해질 때 순수성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나는 그래서 유시민의 ABC론을 단순히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치적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 가치와 이해관계라는 요소를 살펴보게 하는 하나의 분석 도구가 될 수 있고, 실제 정치에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동기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는 의미도 있다. 다만 하나의 분석 도구가 인간 전체를 설명하는 세계관이 되는 순간부터는 그것 역시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ABC가 사람들의 동기를 설명하는 언어라면, D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여야 한다. 나는 한때 유시민 작가를 좋아했던 사람이기에 오히려 그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하기보다 더 오래 질문하고 싶다.


결국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어떤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선택한 가치가 나의 시야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그 가치가 나에게 무엇을 보게 하고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하는지, 그리고 그 가치를 지키려는 나의 열망이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게 만드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가치가 나를 더 자유롭게 하는지, 아니면 가치의 이름으로 나 자신을 또 하나의 확신 속에 가두고 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타인을 의심하기 전에 나의 확신을 의심하고, 상대의 오류를 찾기 전에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순수한 가치를 지키려는 의지가 맹렬해질수록 그것은 역설적으로 배타적 독선에 빠질 위험이 커지고, 결국 타자에 대한 혐오에 지배당하며 자신이 가장 경계했던 편협성이라는 반가치의 지배를 받게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가치의 반대편에 이익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쩌면 가치의 가장 깊은 반대편에는 가치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조차 의심할 수 없는 인간의 확신이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ABC를 넘어 D로.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치에 사로잡히지 않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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