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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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서러움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슬픔은 그래도 말이 된다. 무엇을 잃었는지 설명할 수 있고, 울고 나면 조금 가벼워지기도 한다. 슬프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대체로 알아듣는다. 아끼던 물건이 깨졌을 때, 오래 키운 반려동물을 보냈을 때, 좋아했던 사람과 끝이 났을 때. 슬픔은 그래도 이유가 있고, 이유가 있으면 위로도 된다.

서러움은 그렇지 않다.
서러움은 설명이 잘 안 된다. 사랑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는 것을 잃었을 때, 고마워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보내야 했을 때. 그런 감정들이 갈 곳을 잃고 몸 안 어딘가에 고여있다가 엉뚱한 순간에 올라온다.

오래 다닌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던 날, 정작 그 자리에선 울지 않았는데 집에 와서 혼자 밥을 먹다가 갑자기 목이 메일 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와 어영부영 멀어졌다가 그 친구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이는 한 번도 다정하지 않았던 부모님의 늙어서 작아진 등을 본 순간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이 났다고 한다.


슬프다고 하기엔 애매하고, 괜찮다고 하기엔 자꾸 무언가 걸리는 것. 그게 서러움인 것 같다.

나는 얼굴도 잘 모르는 엄마의 부고를 새엄마 입으로 전해 들었다. 그 순간 울지 못했다. 울 수가 없었다. 슬프다고 말하면 새엄마에게 미안했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혼자 방에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서럽게 울었던 중학생.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던 것에, 소리 내 울 수 없음에 서러웠고, 그 서러움조차 들킬 수 없어서 더 서러웠다. 엄마가 사라지자 이상한 것들이 함께 사라졌다. 원망할 대상이 없어졌다. 언젠가는 따져 물을 수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왜 그랬냐고 물어볼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그 가능성이 영영 닫혔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이 찾아왔다. 내게 사랑이 없음을 도장 찍는 것 같은 느낌.
엄마조차 나를 두고 간 사람이라는 것이, 어딘가에 선명하게 새겨지는 것 같은. 그 빈자리를 채운 건 할머니였다. 다정한 방식은 아니었다.
욕하면서, 때리면서 키웠다. 그래도 키운 손은 그 손이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바카라임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붙잡아준 손. 엄마가 없는 자리를 사랑으로 채운 게 아니라 몸으로 채운 사람.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상처가 너무 많고, 미움이라고 부르기엔 그 손이 너무 선명한.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정리하기도 전에 어른이 됐고, 어른이 되기도 전에 할머니는 가셨다. 임종의 순간이 한동안 믿기지 않았다. 손톱 밑 살이 아직 연분홍이었다. 방금 전까지 내 얼굴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는데. 그 눈물이 뭔지- 사랑이었는지, 미안함이었는지, 그냥 작별이었는지, 이제 물어볼 수가 없다. 그게 제일 서러웠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웠던 사람마저 가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그 손에 기대고 있었는지를. 모진 손이었어도 그 손이 있는 한 나는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그 손이 사라지자 세상에 벌거벗겨진 것 같았다. 등 뒤에 아무것도 없이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다.


두 번의 상실이 겹쳐있었다.
엄마를 잃은 자리 위에 할머니를 잃은 자리가 포개졌다. 서러움은 그렇게 층층이 쌓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번에 다 올라오지 않고, 새로운 상실이 올 때마다 오래된 것들까지 함께 데려오는.

슬픔은 잃은 것에 대한 감정이지만 서러움은 끝내 얻지 못한 것에 대한 감정인지도 모른다. 받지 못한 사랑, 하지 못한 말, 풀지 못한 원망. 그것들이 허공에 남아 갈 곳을 잃을 때 서러움이 온다.

서러운 사람 곁에서는 뭘 해줘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위로의 말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 다 이해 못 해도 여기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진한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래도 사랑의 존재가 있었다는 것. 그 존재가 사라질 때 이렇게 서러운 것을 보면, 그것도 분명 무게가 있었다는 뜻이니까.
서러움은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존재의 무게에서 오는 것 같으니까.

이제는 슬플지언정, 서럽지 않고 싶다.

슬픔은 그래도 말이 되니까. 말이 되면, 견딜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