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점의 목록 앞에서(망설임 3)

by구기리

소개팅을 거듭하는 동안 지안은 스스로 수십 가지의 타협점을 정해두었다. 이 정도 직업이면 되고, 이 정도 나이 차이면 괜찮고, 대화만 편하다면 외모는 조금 눈감아도 된다는 식으로. 그렇게 하나씩 쌓아 올린 기준이 지안에게는 후회하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였는데, 오늘은 문득 그 목록이 정말 맞는 것이었는지, 혹시 그 목록으로 오히려 자신을 가두어온 것은 아니었는지 알 수 없어졌다.


지안에게는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 사귀자는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썸이라고 부르기엔 서로의 일상에 너무 깊이 들어와 있는, 이름 붙이기 애매한 관계였다. 그 애매함 속에서 지안은 오늘 소개팅 자리에 나갔고, 마주 앉은 순간 알아버렸다. 눈앞의 얼굴이 자신이 오랫동안 이상형이라 믿어온 모습 그대로라는 것을.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설렘이 거기 있었고, 그 얼굴은 지안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 결혼을 꿈꿨던 첫사랑의 얼굴과도 닮아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안의 외모 취향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취향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이 남기고 간 모양이었고, 이후로 만난 모든 얼굴은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의 윤곽에 대어 보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화가 이어질수록 마음 한편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상대는 호탕했고 낭만적이었고 즉흥적이었다. 새로운 일이라면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사람이었고, 스무 살의 지안이었다면 그 모습에 틀림없이 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지안은 그 낭만을 좋게 말하면 순수함이라 부르면서도, 나쁘게 말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읽고 있었다. 무엇이든 시작할 줄은 알아도 진득하게 이어가는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고, 프리랜서라는 불안정한 직업 앞에서는 지안이 어릴 적부터 극복하고 싶었던 결핍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지안의 집은 화목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았다. 어린 눈에 비친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모든 불화가 해결될 것처럼 보였고, 그 믿음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소비습관부터 살피는 버릇으로 남아 있었다. 이 사람 곁에서라면 예기치 못한 감정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예감과, 그 예감이 오래된 불안을 정확히 건드린다는 사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러다 지안은 깨달았다. 상대의 이야기에 웃으며 맞장구를 치는 동안에도 마음 한쪽에서는 자꾸 지금 만나는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 대목에서 그 사람이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이 농담에는 어떤 표정으로 웃었을까 하는 생각이 눈앞의 대화 위로 번번이 겹쳐졌다. 눈앞의 사람은 분명 설레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지안의 마음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오늘의 대화가 이전의 어색했던 소개팅처럼 부자연스러웠던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가 지안에게는 억지로 화제를 찾지 않아도 흘러가는 것이었고, 그 흐름을 이미 알아버린 사람에게는 어떤 자연스러움도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외모만 보면 지안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안이 이상적이라 여겨온 삶의 방향과 태도를 고스란히 갖춘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는 안정적으로 그려졌고, 그 그림 속의 지안은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더 알 수 없어진다. 너무 많은 경험과 슬롯화를 거치며 성숙해진 탓에 첫사랑을 닮은 얼굴 앞에서도 예전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첫사랑을 닮았기 때문에, 그 얼굴이 불러오는 옛 기억의 무게 때문에 오히려 이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인지. 설렘이라는 감정이 지금 앞에 앉은 사람을 향한 것인지 오래전 그 사람의 잔상을 향한 것인지조차 지안은 더 이상 구분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사고와 판단의 회로가 고장 난 것 같았고,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모든 계산을 마비시켜버렸다.

지안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 『모순』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순수한 낭만과 본능을 따르는 삶, 그리고 안정과 현실에 타협하며 그려내는 최고의 행복 사이에서 끝내 흔들리던 사람. 어느 쪽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어느 쪽을 택해도 가지 않은 길은 영원히 가정법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안이 정말 물어야 할 것은 누가 더 나은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떤 후회라면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가인지도 모른다. 아직 답은 없지만, 지안은 수십 가지 타협점이 적힌 목록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그 목록 바깥에 서 있는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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