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추석(秋夕) 이야기 1

생활(生活)의 예지(睿智)

byMorpheus


가을은 날짜 따라 도착하지 않았다.


어느 날 무명저고리 소매 사이로 선뜩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더니 저녁녘에 가을은 슬그머니 우리 곁에 내려와 앉아있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쪼여도 깔깔한 기운은 어느덧 안마당을 감돌고 있었다. 채전밭에는 배추포기가 몸집을 키워가고 청무 잎사귀가 대차게 솟아올랐다. 푸른 고춧잎 사이로 빨간 고추가 듬성듬성 보인다.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매미소리의 합창도 언제부턴가 외줄기 솔로로 울다 사라지고 한낮이 적막해졌다. 햇볕이 따가운 마당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는 빨랫줄에는 여름 내내 땀에 젖었던 무명 바지저고리들이 힘없이 널어져 걸려있다.

윗들녘 개간(開墾)한 밭에 심어놓았던 조와 수수며 기장들이 조금씩 고개를 수그리고 무심하게 서 있다. 참새떼가 설익은 이삭 위에 앉았다 호르르 날아가 버린다. 왠지 하늘이 더 높아 보이고 옥색빛이 완연하다.

어둠이 깔리면 수풀 속에서 줄기차게 울어대든 개구리들도 지쳤는지 고요가 찾아온다.


바삐 흐르는 여울에 부서지며 떠내려오던 반달이 작은 보(洑)에 갇혀 물비늘을 타고 출렁인다. 물비늘이 잠이 들면 하늘의 반달이 보(洑)의 반달을 마주 보며 밤을 밝혔다.


한낮에 동네 개구쟁이들이 물장구치던 보(洑)는 깊지 않았다.

절기(節期)상 백로(白露)가 지나면 할아버지는 삼촌에게 당부가 많아진다. 추석(秋夕) 맞이 준비를 하라 하신다. 조생종(早生種) 벼를 수확하고 밤송이를 따고 감나무 꼭대기에 올라 홍시도 따야 한다. 제사상(祭祀床)에 올릴 제물들을 미리 준비한다.

맑은 날을 택일(擇日)하여 성묘(省墓)도 해야 한다. 선영(先塋)을 벌초(伐草)하는 일이 만만찮았다.


여름 내내 자란 칡덩굴이며 무성한 잡초들을 깎는 일은 하루가 부족하다. "처삼촌 묘에 벌초하듯" 하면 반나절에도 끝낼 수 있지만 삼촌은 온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꼼꼼하고 깔끔하게 벌초를 했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산 사람의 삶의 중심이 선령(先靈)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 보였다. a사대봉사(四代奉祀)를 했는데 양친(兩親)의 제사를 각각 따로 지냈으니 두 번의 명절을 보태면 1년에 열 번의 제사를 모셨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명절(名節)은 사자(死者)의 몫이었다. 지켜온 전통과 관습에 순종(順從)하는 것이 효(孝)의 시작이자 산 자(者)의 도리(道理)가 되었다. 그래서 가족의 위계(位階)가 가지런했다.

돌아보면 그때 어른들의 삶이 강고(强固) 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의 삶이 풍족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없다.


주어진 몫 이외에는 탐하지 않았다. 부족함에 대한 한탄이나 불평은 들어 본 바가 없다. 남으면 나누었고 모자라도 궁색하지 않았다.

추석이 오면 그 분위기가 즐거웠다. 중천(中天)에 만월(滿月)이 뜨면 삶이 둥글어지기를 소망했는지 모른다..

선영(先塋) 전경 Chat Gpt 제공


註
a사대봉사(四代奉祀) 부모에서 고조부모

까지 四代의 제사를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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