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歲月)의 그림자
지하철 1호선, 제기역 부근의 약령시장에 가려고 2번 출구 쪽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금방 지하철에서 내린 승객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계단을 올라가는데 모두가 느릿느릿 하다.
아내 따라 몇 번 와 본터라 그렇게 생소 하지는 않지만, 이곳은 참 오래된 곳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살아 오래되어 보이 는지, 아니면 이곳이 오래되어 나이 드신 분 들이 많은지 분명치가 않다.
경동시장의 약령시 정경 이미지 gpt제공
느릿한 노인들을 피해 계단을 올라가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재빨라 보인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을 거야.."
노인들의 힘든 숨소리에 섞여서 흘러나오는 듯하다.
세월이 이삼십 년 만 흘러가면 다시는 보지 못할 분들이 많겠지 하는 생각에 내 나이도 손가락을 접으며 세어본다.
그래도 아직은 저 늙은이들과는 구별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계단이 좁아 올라가는 사람들과 지하철을 타려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한다.
내 바로 앞에 곱게 늙어 보이는 백발의 영감님 한 분이 느릿하게 계단을 올라가다 내려오는 사람한테 부딪히고 말았다.
"어흐~"
하면서 내려오는 사람을 쏘아본다. 예순 중반이 얼추 넘어 보이는 이 양반의 반응이 또한 만만찮아 보인다.
"으흐 라니 ᆢ 똑바로 보고 가! 눈깔 뒀다 어디 쓸라오?"
좁은 계단 위에서 여지없이 거친 말들이 튕겨 나온다.
"어, 이 자슥이 어른 앞에 ᆢ"
하면서 깐깐하고 대차보이는 영감님이 오르던 계단을 따라 도로 내려간다. 좁은 계단길이 엉키고 설켜 아수라장이 된다.
계단 아래서 둘이 붙었다. 구경 좋아하는 영감들은 말릴 생각을 않고 빙 둘러섰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려라"
아무래도 백발의 영감이 안쓰러워 보여 따라 내려온 내가,
"참으시라"
고 말렸지만 이 백발의 영감님은 세무서 계장처럼 깐깐하다.
"새파란 넘이 어른을 뭘로 봐?"
"뭔 소리여. 나도 솔찮게 먹었어, 왜 이래."
호기롭게 덤벼던다.
"그래, 몇이여?"
드디어 나이 싸움이 벌어졌다. 노인들 싸움 에는 나이가 재판관이다. 나이 적은 편이 꼬리를 내리는 것이 예사다.
오가는 젊은이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간다. 내가 그 양반 팔을 잡아끌며 그냥 가시라 하니,
" 자낸 뉘기여?"
반말로 그런다.
"아이고 , 그냥 가시지요. 지나가다 영감님 다치실 것 같아 그럽니다."
자기편인 걸로 아는지 안도하는 표정이 계면쩍어 보인다.
상대방 영감에게도 어서 가시라 하고는,
" 영감님은 도대체 얼마세요?
궁금하여 설쩍 물어보니 예순일곱이란다.
지나온 삶이 고단했을까, 아니면 입성 때문일까? 연세보다는 주름이 깊다.
늙어지면 숫자로는 대중하기가 힘든 것이 노인네 얼굴인가 보다. 나이 분간이 어렵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때마침 신설동행 전철이 들어온다. 서먹할 새도 없이 서로 돌아선다. 다시 계단을 오르며 조금은 살가운 표정으로,
"그쪽은 몇이오?
백발의 영감님이 물어온다.
"엊그제 염색을 했답니다."
그 영감님이 한참을 쳐다보다 뒷짐을 지고 헛기침을 하며 발길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