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기차가 나를 원하지 않은 역에 내려놓았을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나가버린 기차를 되돌릴 수도, 이미 출발한 기차를 멈출 수도 없다. 선로 위의 인간은 자신을 싣고 가는 거대한 힘 앞에서 무력해 보인다. 그러나 기차가 멈춘 뒤에도 우리의 여정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역에서 내릴지, 그곳에서 어떤 기차로 갈아탈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차를 멈출 수 없는 인간에게도 환승할 자유는 남아 있다.
1. 기차는 영화의 시작과 맞물려 있는 기물이다. 영화라는 존재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 평가받는 '뤼미에르 형제'. 그들이 카메라로 포착한 것은 노동자, 그리고 기차였다. <열차의 도착>이라는 영화에서 기차의 진입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은 정말로 기차가 나에게 다가오는 줄 알고 혼비백산해 달아났다고 한다. (참조 1) 이 시점에서 열차는 '도착'과 동시에 '시작'의 의미를 지니며, 그중에서도 '영화의 기원'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러한 의미를 머릿속에 새겨둔 채 영화 <파벨만스>를 보자. 스티븐 스필버그가 본인의 유년기부터 청소년기를 소재로 만든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새미는 부모님 손에 억지로 이끌려간 이끌려 억지로 영화관에 간다. 그는 처음 본 영화에서 기차의 움직임에 완전히 매료된다. 이후, 새미가 처음 촬영하는 영상이 기차 장난감들이 충돌하는 내용이다. 이 시점에서 기차는 곧 영화이고, 그가 기차에 빠지는 모습은 영화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2.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는 기차로 시작해서 기차로 끝을 맺는다. 자식들이 살고 있는 도쿄에 도착한 노부부는, 러닝타임 내내 자식들에게 외면만 받는다. 유일하게 노부부를 제대로 챙겨주는 존재는 혈육이 아닌 며느리 노리코이다.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위독해져 죽음을 맞이해도, 자식들은 잠깐의 슬픔만 내보일 뿐 금방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 그리고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 시간의 덧없음을 체감한 아버지는 아내의 유품인 시계를 며느리에게 맡긴다. 한번 출발한 기차를 멈출 수 없듯이, 시간의 흐름이란 결코 붙잡을 수 없다.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버리기 전에 그 소중함을 깨달으라고 말하는 듯한 이 시퀀스에서, 기차는 곧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시각화한 존재이다.
3.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이름을 빼앗기고 본래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센은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여정 도중, 기차에 탑승한다. 이 여정에서 기차에 탑승하는 행위는 현재의 자아가 과거의 자아의 회복을 욕망하는 움직임이다. 2번에서 기차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냈고, 작중 인물들은 그 흐름에 굴복하고 만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서사는 지나간 기차를 다시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기차가 없다면 현재를 복원할 수 없고 미래로도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기차 여행은 과거의 반추임과 동시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이다.
4.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는 <동경 이야기>처럼 기차로 시작해 기차로 끝맺는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기차가 가진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동경 이야기>의 서사는 이미 지나가버린 기차처럼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 인간이, 끝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과거가 없는 남자>는 기차에서 내린 남자가 폭력배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과거를 완전히 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정체성은 완전히 무로 돌아갔지만, 동시에 그는 과거라는 시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과거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듯. 주인공은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구축한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띄고 있는 아키 유니버스의 인물들은 일견 차가워 보이지만 온기로 가득한 악수와 포옹을 건넨다. 허름한 컨테이너를 개조해서 만든 집, 구세군이 제공한 양복, 없는 요리 솜씨로 서툴게 해낸 요리, 어찌어찌 의식주의 형태는 갖췄지만 그 퀄리티는 빈말로도 좋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행동에서는, 왠지 모르게 걱정이 아닌 내일을 살아가는 사람의 희망이 보인다. 새로운 주거환경, 새로운 온라인 게임, 새로운 여자친구, 완전히 '새로운' 삶이 주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던 그때,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찾는 전단지를 발견한다. 완전히 자취를 감춘 줄 알았던 '과거'라는 시제가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동시에, 새롭게 얻은 것들을 다시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주인공은 기차를 타고 아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과거는 주인공의 걱정과 달리 전혀 그를 압박할 생각이 없었다. 주인공과 아내의 관계는, 주인공이 기억을 잃기 전부터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풍전등화의 상태였다. 심지어 아내는 주인공이 떠나고 나서 이미 새로운 연인을 만난 상태였다. 서로에게 전혀 연연하지 않는 과거와 주인공은, 각자의 앞날을 응원하며 누구보다 쿨한 이별을 택한다.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기차는, 인간을 얽매고 있는 과거라는 족쇄와 인간을 직면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그리고 인간은 끝내 도끼를 들어 그 족쇄를 부수고 만다.
5.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최신작인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도 기차가 등장한다. 서로에게 끌리는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 그러나 남자주인공은 심각한 알코올 중독이었고, 알코올 중독 때문에 가족의 붕괴를 경험한 바 있던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과의 관계에 회의감을 느낀다. 두 사람은 이 때문에 잠정적인 이별을 맞는다. 술 때문에 온라인 게임도, 인간관계도 잃어버린 남자주인공은 결국 금주를 택한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서던 중, 돌연 기차에 치여 혼수상태에 이른다.
여기서 기차는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재난 혹은 힘을 뜻한다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힘에 꺾인다고 해서 삶이 완전한 종말을 맞는 것은 아니다. 남자 주인공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 주인공은 끊임없이 병원을 찾아 그의 곁을 지킨다. 마침내 깨어난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과 함께 퇴원한다. 여자주인공이 새롭게 따르는 개의 이름이 '채플린'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채플린의 코미디가 관객들에게 모든 대립과 고통을 무화하는 즐거움을 선사했듯이(참조 1), 아키의 영화 속 녹아있는 코미디 요소들도 상처 입은 인간을 치유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부여할 것이다.
1번과 2번에서 볼 수 있듯이, 영화는 기차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 거대하고 육중한 기계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앞을 향할 때, 관객들은 그 움직임에 압도된다. 한번 선로 위에 올라탄 기차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다. 기차는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이다.
기차의 움직임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난 뒤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이다. 3번부터 5번까지의 영화는,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 속에서 새로운 삶을 구축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과 행동을 보여주었다. 스스로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 자신을 얽매고 있는 단단한 족쇄와 직면하여 몸소 그것을 부술 힘 얻기, 사고를 당하고도 꺾이지 않고 연대하며 나아가기. 이러한 의지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 나오는 낙관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기차가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든, 나는 다시 환승해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낙천적임. 그 낙천적임에서 생겨난 의지만 있다면, 지금 당신이 어느 역에 내렸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어디로든 환승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니까. 기차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든, 나는 어느 역에선가 내려 다시 환승할 수 있다.
기차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든, 나는 어느 역에선가 내려 다시 환승할 수 있다. 기차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어도, 다음에 올라탈 기차만큼은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만난 환승역》에 담긴 스물여섯 편의 글은 바로 그 선택의 기록이다. (필자의 환승 기록도 담겨있다)
어떤 역에 내린 인간은, 인간을 기다리고 있던 '자유'와 마주한다. 자유는 동전과 같아서 한쪽 면에는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해방감이, 다른 한쪽에는 어디로 떠나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당혹스러움이 새겨져 있다. 이 바카라은 당혹스러움의 면을 마주한 독자에게 하나의 환승 교본이 되어줄 수 있다. 다른 이의 행로를 그대로 따라가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 갈아탄 기차들을 바라보며, 누구도 가보지 않은 자신만의 행로를 상상해 보라는 뜻이다. 자신만의 행보가 정해지고 나면, 당혹스러움의 면을 보이던 동전이 서서히 해방감의 면으로 뒤집히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활동사진’이라고 불렀다. 활동사진이란 연속하는 움직임을 여러 개의 프레임으로 나눈 뒤 다시 이어 붙인 것이다. 이 바카라에 담긴 스물여섯 개의 환승 기록도 하나씩 이어 붙인다면, 썩 괜찮은 활동사진, 아니 영화 한 편이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이 완성된다.
참조 1. 강신주 외 1명, <씨네샹떼>,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