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 없습니다.
만약 1막에서 무대에 권총을 걸어두었다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것이 발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걸어두지 말라.
안톤 체호프
"체호프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일세. 필연성이라는 것은 자립적인 개념이야. 그것은 논리나 모럴이나 의미성과는 다르게 구성된 것이지. 어디까지나 역할로서의 기능이 집약된 거야. 역할로서 필연이 아닌 것은 거기에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반면 역할로서 필연인 것은 거기에 있어야 하네. 그것이 바로 연극의 대본을 만드는 방법, 좀 더 유식한 말로는 희곡 작법이라고 하지. 논리나 도덕이나 의미는 그것 자체가 아니라 관련성 속에서 생겨나네. 체호프는 희곡 작법을 이해하고 있었던 거야."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요. 이야기가 너무 어려워."
"자네가 안고 있는 돌은 체호프가 말한 권총일세. 그것은 발사돼야만 해.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중요한 돌이지. 특별한 돌이야. 하지만 거기에 신성성 같은 것은 없다네. 그러니까 자네는 뒤탈 같은 것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단 말일세."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中
총이 장전된 장면을 보여주었다면 그 총은 반드시 발사되어야만 한다. 체호프의 총은 작품 내에서 '필연'을 뜻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우연과 무의미를 추구하는 영화라면, 혹은 작품에 관객들이 충분히 개입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면, 작품이 필연의 연속으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하루키의 작품들—그중에서도 <태엽 감는 새>와 <해변의 카프카>—은 메타포로 가득하다. 작중 공간은 꿈과 현실을 계속해서 오간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지만 그 사건이 꿈과 현실 중 단 하나에만 속한다고 볼 수는 없다. 작품 속에는 언어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여백이 존재하며, 그 여백은 하루키 세계의 핵심 원리인 ‘무의미’를 독자가 직접 체험하게 한다. 그렇다고 그 여백이 아무것으로나 채울 수 있는 텅 빈 공간인 것은 아니다. 하루키는 독자가 여백을 채울 수 있도록 작품 곳곳에 충분한 힌트를 남겨놓는다.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누군가는 세계의 법칙을 깨달아야 한다. 이처럼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사건들은 하루키의 세계에도 체호프의 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하루키는 자신이 직접 모든 과녁을 정해놓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그는 충분한 탄환이 장전된 총을 독자에게 건넨다. 총알은 반드시 작품 안에 남겨진 힌트와 사건을 따라 발사되어야 하지만, 무엇을 겨냥하고 각각의 총성을 어떻게 연결할지는 독자의 몫이다. 여백을 아무렇게나 채울 수는 없지만, 반드시 하나의 방식으로만 채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호프>는 하루키의 작품과 일견 비슷해 보인다. <호프> 역시 매력적인 설정과 완전히 채울 수 없는 여백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하루키의 작품들과 <호프>가 관객을 대하는 방식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호프>는 관객에게 체호프의 총을 보여주면서도, 정작 그들의 손에 총을 쥐여주지는 않는다. 여백을 채울 만한 충분한 힌트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무엇을 겨냥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다. 결국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작품 세계에 속한 인물들이고, 관객은 그 총성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지 못한 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관객의 해석이 들어갈 자리를 닫아놓았다면, 적어도 영화는 이미지와 대사, 서사의 힘으로 그 빈자리를 스스로 설득력 있게 채워야 한다. 그러나 <호프>는 그마저도 해내지 못한다. SF와 코즈믹 호러의 분위기를 강렬하게 잡아주어야 할 CG는 배경과 잘 매치되지 않으며, 영화의 전면에 등장할 때마다 헛웃음을 유발한다. 인물들의 대사는 이 감독이 <추격자>와 <곡성>의 대사를 쓴 감독이 맞나 싶을 정도로 1차원적이며, 완급조절에 실패한 서사의 진행은 몰입도를 크게 떨어뜨린다.
<호프>의 세계관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매력적인 세계에 관객을 끌어들일 준비는 충분하지 않다. 관객들이 꼭 한 번 쏴보고 싶을 정도로 멋들어진 총을 만들어놓고, 정작 관객의 손에 그 총을 쥐어주지 않는 것은 무슨 어째서일까. 심지어 탄창 속에 아직 발사되지 않은 총알이 남아있는 게 보이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