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을 때

by정지우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시절이 있었다. 불안이 공포와 다른 점은, 대상이 없다는 점이다. 두려움이 언제나 실직, 이별, 전쟁처럼 어떤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라면, 불안에는 대상이 없다. 불안은 그저 어느 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내가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으며, 어떠한 정해진 길이나 소속도 없다는 걸 깨달으며 시작된다. 나는 마치 떠다니는 먼지처럼 여기 있다. 바람 한 점에도 어디로 날아갈지 모른 채로.

불안이 극에 달하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학교 같은 소속이 전혀 없었고, 친구도 없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취업을 했거나 학위과정을 밟는 등 각자의 소속 안에서 부지런히 나아가느라 바빴다. 그러나 내게는 '소속' 비슷한 것이라고 할 만한 건 취업 스터디 정도였다. 하지만 그 취업 스터디라는 것에도 가면, 보통 나이도 내가 제일 많았고, 내가 제일 애매했다. 서른 먹도록 취업 준비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으니, 이십대 대학생들이 볼 때는 약간 이상한 아저씨 같았을 것이다.

사람이 불안이 극에 달하면, 확실히 이상해진다는 것도 그 때 많이 깨달았다. 감정기복이 너무 심했고, 슬롯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에도 예민했다. 참사가 일어나면 눈물과 분노가 일었고, 하염없이 길을 걷다가 시위대나 인파에 휩쓸릴 때면, 마치 온 하늘이 붉은 색이어서, 내가 지옥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회도 가보았는데, 두 달인가 다니고 도망치듯 나오기도 했다. 내 몸에 맞는 '집' 같은 건, '소속' 같은 건 도대체 세상에 없는 것 같았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는, 그야말로 불안에 잠식당해 약간 미쳐버린 남자 황동만이 등장한다. 그는 20년간의 실패로, 다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있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막말을 하며 싸우거나, 도저히 상대해주고 싶지 않은 밉상이 되어 있다. 그 시절의 내가 황동만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래도 불안하다고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서 쉴 새 없이 떠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쉴 새 없이, 매일같이, 글을 썼다.

황동만은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고, 비탈길을 내리 달리며 불안을 이겨내려 하지만, 나는 대체로 많이 걷는 것으로 해결했다. 3시간, 4시간 정도를 걷곤 했다. 청계천의 끝에서 끝까지도 걸어보았다. 그냥 무작정 걷는 것이다. 불안이 사라질 때까지. 지쳐서 그만 내 자취방의 어둠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까지. 그렇게 보면, 다행히 황동만에 비해 얌전했던 나는 그다지 주변에 피해를 많이 끼치진 않은 것 같다. 물론, 낯 부끄러운, 흑역사 같은 기억들도 몇 개 나긴 하지만, 역시 황동만 만큼은 아니다.

그래도 그 시절, 나는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불안을 그렇게 미워하지만은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사랑했던 실존주의 철학자들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일군의 철학자들은 '불안'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적인 상태에 가깝다고 본다.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기에, 무엇이라도 될 수 있고, 그야말로 '리트머스지'처럼 이 세계에 반응하며, 어떠한 존재로도 나아갈 수 있는 그 상태야말로, 일종의 '실존적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불안이 쌓이고 쌓이다가 그야말로 '무소속'과 '무관계'의 서른에 내게 도래했던 그 불안의 절정에서, 나는 삶을 새로이 시작하게 되었다. 인간은 한계까지 가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무엇이든 다시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냥 나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었다. 삶도, 사랑도, 나 자신도. 그러려고 모든 관계를 저버리고 먼저 백지가 되었다. 나는 그냥 나홀로 삶을 다시 한 번 시작했다. 삶에는 한 번쯤, 그런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냥 다 뒤엎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불안의 끝에서,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그러나 결코 이전과 같은 삶이 아닌, 다른 삶으로.

* 사진 - #모두가자신의무가치함과싸우고있다 캡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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