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병명을 지우고
모진 시간들을 묵묵히 견뎌내며 저는 제법 씩씩해졌습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 나만을 위한 따뜻한 식탁을 정성스레 차려내고, 하루하루 "나는 더 건강해질 거야"라는 희망을 요리했습니다. 하지만 몸의 상처가 아물어가는 동안에도 마음은 시시때때로 길을 잃고 비틀거렸습니다. 길을 걷다 누군가와 부딪히기만 해도 왈칵 서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요. '나는 아직 이렇게 힘든데, 세상은 왜 이리도 무심하게 흘러갈까.' 연약해진 나를 지키겠다는 핑계로 잔뜩 웅크린 채,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오히려 제 마음을 더 깊게 베어내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밝고 굳셀 수만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계절이 바뀌며 피고 지고 또 피는 자연처럼, 우리의 마음 역시 한없이 단단해졌다가도 작은 바람에 쉽게 허물어지며 약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요. 특히나 무거운 병과 싸워내고 있는 과정이라면, 불쑥불쑥 찾아오는 두려움과 서러움은 너무도 당연한 감정일 것입니다. 환자로서 겪어내야 하는 수많은 낯선 순간들 속에서 굳건하게 버티기만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몰라요.
그런 일들을 겪으며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나를 가두고 있던 그 외로운 감옥은 세상의 무심함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빚어낸 두려움의 그림자였다는 것을요. 이제 저는 때때로 찾아오는 이 먹먹한 슬픔과 무기력을 억지로 밀어내려 애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만히 끌어안아 주고 싶어요. '많이 무섭고 지쳤구나, 당연해. 누구나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웅크린 마음에 다가가 스스로 따뜻한 위로를 건네기로 했습니다.
병명을 가슴 깊이 새기며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깟 병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존엄한 존재이며, 병은 내 긴 삶을 잠시 스쳐 가는 작은 먼지일 뿐이니까요. 그 흔적을 조용히 바라보고 바람에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게 되면, 비로소 온전히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의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환자'라는 건조한 단어 하나가 나를 집어삼키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삶을 흔들었던 그 못된 병은 고작 찰나의 얼룩에 불과했으니, 기어이 도려내고 비워낸 그 자리에는 이제 더 크고 눈부신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몸에서는 매일 수많은 세포가 조용히 스러지고 또 새롭게 피어난다고 합니다. 눈을 뜨는 매일 아침은 내게 주어지는 눈부신 기적이자 완벽히 새로운 기회입니다. 맑게 차오르는 매일의 시간을 자유롭게 누리며, 이제 저는 환자가 아닌 가장 온전하고 아름다운 '나'로서 새롭게 피어납니다. 내 삶의 다정한 주인이 되어, 오늘도 제게 주어진 하루를 눈부시게 살고 싶습니다.
아픔을 겪어낸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충분히 위대하며,
상처를 딛고 다시 피어난 우리는 찬란하게 빛날 자격이 있으니까요.
그동안 저의 서툴지만 진심 어린 치유의 식탁에, 그리고 이 긴 여정에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서투르고 투박한 글임에도 화면 너머에서 건네주신 '조회수'와 ‘라이킷’의 온기는 제게 지치지 않는 걸음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알림이 울릴 때마다 따스한 불이 켜지는 것 같았고, 마음의 결을 나누는 유대감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페이지들 너머로, 조금 더 깊어진 호흡과 새로운 이야깃거리들을 모아 한 권의 바카라으로 엮어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자연의 속도에 맞춘 계절의 요리들과, 우리를 가만히 살라내는 일상의 다정한 기록들을 가득 담아 머지않은 날 더 정돈된 모습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우리가 거쳐온 이 소중한 지면 위에서, 그리고 다정하게 피어오를 또 다른 이야기 안에서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볕이 잘 드는 날들 속에서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10월의 가을비가 내리던 어느 날 밤, 작가 진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