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닮은 너를 보면

하나뿐인 나의 동생에게

by해원

나에겐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한 명 있다. 동생을 떠올리면 집 앞 골목길에서 세 발 자전거 뒤에 동생을 태우고 동네를 돌아다니던 어린 시절이 먼저 떠오른다. 나는 네다섯 살쯤, 동생은 두세 살쯤 됐을 것이다. 뒷자리에 동생을 태우면 내가 대장이라도 된 양 의기양양해선 못 갈 곳이 없다는 듯 들뜨곤 했다. 동생은 내 뒤에서 까르르 잘도 웃어댔다.


동생과 내가 함께 찍힌 사진에는 갓난아기인 동생에게 젖병을 물리는 데 집중한 내 모습이 보였다. 또 다른 사진에선 인형 유모차에 동생을 앉히고 두 손으로 동생의 머리를 예쁘게 빗어주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의 놀이는 다양했다. 여름이면 대문 앞에 돗자리를 깔고 블록 놀이를 했다. 당시 옥스포드라는 장난감 블록 회사가 유명했는데 알록달록한 레고 블록을 모양에 맞춰 끼우다 보면 장난감이 뚝딱 완성됐다. 동생과 나는 함께 만든 레고를 부수고 다시 만들기를 반복했다. 바카라장 앞에 앉아 손이 닿는 위치에 꽂혀 있는 바카라을 모조리 뺐다 다시 꽂기도 했다. 그래봤자 제일 아래 칸의 바카라 몇 권에 손을 뻗는 게 다였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동생은 내가 무언가를 하며 놀고 있으면 어느새 옆에 와서 따라 했고 그러면 나는 더 신이 나 새로운 놀잇감을 찾아다니곤 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동생이 태어난 후 진심으로 기뻤던 것 같다. 함께 놀 친구가 생긴 느낌이랄까. 동생을 나의 놀이에 동참시키며 세상 고민 없이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어릴 적부터 비교적 주장이 확실했던 나와 달리 동생은 성향이 온순하고 착했다. 갓난아기일 때도 밤낮이 바뀌지 않았고 으레 자라는 아이들이 그렇듯 투정 부리거나 고집을 피우는 일도 없었다. 동생은 반짝반짝한 구슬이나 장난감 자동차 같은 걸 모으길 좋아했다. 동네 아이들이 순한 동생을 만만하게 생각하고 놀리려는 낌새가 보이면 나는 '우리 OO 괴롭히지 마라!'라고 소리쳤다. 지금의 내 성격이라면 그러지 못했을 테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퍽 발랄하고 씩씩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둘 다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전과 다른 변화가 생겼다. 그전까지만 해도 동생보다 내가 언제나 키와 몸집이 컸기 때문에 동생에게 힘으로 밀린 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그 반대가 된 것이다. 동생은 날이 갈수록 키가 자라더니 금세 나를 따라잡았다. 사소하게 시작한 말다툼이 트리거가 되어 동생은 단숨에 나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금방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무리 몸부림쳐도 동생을 힘으로 이길 수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서러움과 분함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내가 누난데 누나한테 이래도 돼? 같은 꼰대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이후에도 우리는 별 것 아닌 일로 종종 싸웠고 다음날 아침 등굣길에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지며 아무렇지 않게 화해하곤 했다.


그런 우리도 한동안 냉각기를 거친 시기도 있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며 공부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동생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고 동생은 동생대로 친구들과 어울리며 예전의 돈독함은 점점 옅어졌다. 나는 내심 속이 상했다. 우리의 관계를 예전처럼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동생에게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낸 후 우리는 대학생이 되었고 동생은 내가 다니는 학교로 입학했다. 동생이 후배로 들어온다는 사실이 반가워 나는 짐짓 선배인 척하며 내가 좋아하는 학교 주변의 맛집과 술집을 줄줄 알려주었다. 동생은 연신 '아 진짜?'라며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시간이 좀 지나 '누나 거기 가봤는데 맛있더라!'라고 말해주었다. 동생은 예전부터 그런 식이었다. 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말을 기억해두고 있다가 나중에 슬며시 따라 하곤 했다.




그 후로 나는 취업을 했고 동생은 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나는 갓 입사한 회사에 적응하기 위해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동생은 학교 생활과 대학원 진학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가끔 학교 주변에서 고기를 먹거나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학교라는 공통점을 매개로 서로의 일상과 고민을 나누었다. 그동안 내가 동생을 어리게만 여겼던 탓인지 대학생이 된 동생과 말이 잘 통했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아져 있었다. 동생과 나는 술을 즐기는 편이어서 평소에는 잘 꺼내지 않는 쓸데없이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에도 좋았다. 부모님한테나 친구한테 하지 않은 얘기 중 몇몇은 동생에게 했다. 같은 양육환경에서 자라고 학창 시절도 거의 비슷해서인지 어렵지 않게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고 어떤 고민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도 했다. 동생은 꽤나 현실적인 시각에서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었다. 항상 어리게만 생각했던 동생과 친구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동생도 나와 비슷하게 느꼈는지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기대하지 못한 관계의 재발견이었다.


한 날은 동생이 새롭게 만나기 시작한 여자친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과묵한 편인 동생이 할 법한 얘기 같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게 만났는지 왜 만나게 되었는지와 같은 궁금한 것들도 중간중간 질문해 가며. 동생은 독서모임에서 여자친구를 만났으며 여자친구는 자기보다 연상인 대학원생이라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랑에 빠진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선했고 알 수 없는 얄미움(?)과 '니가 연애를 한다고?' 같은 유치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 시작하는 만남이었지만 동생은 사뭇 진지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대학원 진학 준비로 바쁜 시기를 보내는 와중에 연애를 하리라 마음먹은 걸 보면 좋은 사람을 만났나 보다 싶었다. 한편으론 이런 얘길 나에게 하는 걸 보면 내가 그래도 영 못 미더운 누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동생은 얼마 전, 가족들에게 그 여자친구와 결혼 계획을 발표했다. 정확히 말하면 혼인신고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막연히 언젠가 결혼을 하리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꽤 놀랐다. 왜냐하면 동생이 박사학위 과정을 위해 조만간 미국으로 떠나는 일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친구는 한국에서 온라인 게임을 다니고 있었다. 그러면 장거리 연애를 할 것이냐? 장거리도 보통 장거리가 아닌데 앞으로도 이어갈 수 있으려나? 등의 생각을 혼자서만 했다.


동생은 다음 말을 이었다. 내년에 여자친구도 미국에 함께 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배우자 비자를 받으려면 혼인신고를 먼저 해야 해서 조금 서두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둘의 관계가 얼마나 견고한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동안 취업 준비와 취업, 시험, 이직 등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헤쳐오고 관계의 온도를 맞춰오면서 다정과 신뢰가 쌓였으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확실한 외부요소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있는 힘껏 둘의 앞날을 축복해주고 싶었다. 여자친구도 동생이 가게 될 학교의 박사과정 진학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나라면 한국의 고향과 직업을 두고 타국행 비행기에 오를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쉬이 대답하기 어려웠다. 큰 변화가 따르는 만큼 둘에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음이 분명하기에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내비치기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항상 응원한다는 말을 건넸다.




동생과 나는 다른 듯하면서 꽤 비슷한 구석이 많다. 종종 엄마는 나는 아들 같은 딸이고 동생은 딸 같은 아들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섬세하거나 살가움이 부족했지만 가끔 대범한 면이 있었고 동생은 잔정이 많아 따뜻한 면모를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곤 했다. 이런 우리의 공통점은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일에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엔 나에게도 동생에게도 이런 성향이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해 그럭저럭 지내는 듯 보였으나 우리는 1~2년 주기마다 이직을 반복했다. 동생과 이야길 해보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어려운 길임을 알지만 이루고 싶은 게 있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동생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힘을 얻기도 했기에 이런 부분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다.


우리는 예상했던, 혹은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것들을 하나둘씩 반복할 때마다 실망감은 커졌고 조금 방황하는 듯싶더니 어김없이 다른 방향을 찾아 나섰다. 세상엔 많은 일들이 예상한 바와 다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일을 경험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이상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방향의 길을 택했다. '꿈'이나 '미래'에 대해 말할 때 우리의 대화는 은은하게 활기를 띠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이상을 그리기란 외롭고 고된 일이었다. 이상을 향해 있을수록 그 간극은 더 빠르게 벌어져갔다.


나와 닮은 동생의 뒷모습을 가만히 볼 때가 있다. 각자의 집에서 중간 지점인 서울대입구역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지는 길이었다. 돌아가는 동생의 모습을 보는데 이유 없이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새 훌쩍 철이 들어버린 모습을 볼 때마다 기특하면서도 애틋했다. 동생도 취업과 동시에 상경한 지 4년 차였고 온라인 게임생활과 유학 준비를 동시에 해내느라 애쓰고 있었다. 이루고자 하는 이상이 큰 만큼 남들보다 몇 배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누군가는 왜 구태여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느냐고 할지 몰라도 이십 대 중반부터 품어온 그의 꿈을 알기에 나는 항상 희망과 용기를 건네는 일을 자처했다. 작은 말 한마디가 동생은 생각보다 큰 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 시간들이 쌓여 결실을 이룬 것일까. 지난달 말 동생은 가고 싶었던 학교의 박사학위 과정을 밟으러 미국 땅을 밟았다. 학위를 취득하려면 짧아도 5년은 걸릴 것이었다. 그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올지 미국에 정착해 살게 될지도 불확실하다. 대학원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온 시간을 알기에 그에 걸맞은 보답을 받은 것 같아 기뻤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하나뿐인 혈육이자 또 다른 친구였던 동생의 부재에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껴야 했다. 엄마와 함께 동생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에 간 날,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밝은 표정으로 브이를 한 채 웃고 있는 동생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새로운 시작은 얼마간의 고통과 시련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럴 땐 그 당연한 사실이 괜히 야속하게 느껴졌다. 사려 깊은 성격을 가진 동생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더 환하게 웃으며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힘들어 쉬고 싶을 땐 언제든지 돌아와도 된다고, 항상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을 테니까 그때까진 걱정 말고 세상을 훨훨 날아보길. 내 동생 힘내!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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