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회의실을 생각해보자.
발표자가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틀린 것 같다. 데이터가 다르게 읽히거나, 논리에 빈틈이 보이거나,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다. 이 순간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말해야 한다는 생각과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온다.
틀렸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발표자와 불편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 이 두려움들이 말하는 것을 이긴다. 그래서 우리는 입을 다문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역시 그게 문제였다는 것이 드러날 때 우리는 생각한다. 말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가 남는다.
이것이 우리가 틀릴 용기라고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남을 틀렸다고 말하는 용기에 관한 것이 아니다. 더 깊고 더 어려운 것에 관한 것이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하는 용기. 내 생각이 틀렸을 때 그것을 인정하는 용기. 틀릴 가능성이 있는데도 시도하는 용기. 이 용기들이 AGI 시대에 왜 중요해지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그리고 왜 이것이 단순한 미덕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의 핵심에 닿아있는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인간은 정답을 찾고 싶어한다. 이것은 본능에 가깝다.
신경과학자 로버트 버튼은 이것을 '옳다는 느낌'이라고 불렀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인받을 때 뇌의 보상 시스템이 활성화된다. 반대로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 그것은 실제로 고통스러운 신경학적 반응을 일으킨다.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슬롯적 차원이 더해진다. 우리는 집단 안에서 자신의 판단 능력을 신뢰받고 싶어한다. 자주 틀리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이 지위와 영향력을 잃는 것과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틀렸을 때도 옳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단기적으로 더 유리해 보인다.
뇌의 보상 구조와 슬롯적 생존 본능. 이 두 가지가 우리를 틀릴 용기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구조적 힘이다. 이것에 맞서는 것이 단순한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님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옳고 싶은 욕구가 지나칠 때 치르는 비용이 있다.
첫 번째는 배움의 상실이다. 틀릴 수 없는 사람은 배울 수 없다.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다른 생각을 진심으로 들을 수 없는 사람이 성장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번째는 관계의 손상이다. 절대 틀리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생각해보자. 처음에는 그 확신이 안정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벽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 생각이 실제로 고려되지 않는다는 느낌. 틀릴 수 있음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없고, 진정한 대화가 없는 관계는 깊어지기 어렵다.
세 번째가 가장 크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하는 사람은 더 많은 관점을 수집하고, 더 신중하게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을 때 기존의 판단을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옳아야 한다는 압박 아래 있는 사람은 첫 번째 결론에 집착하고, 반대 증거를 무시하고, 수정하는 것을 실패로 경험한다.
틀릴 용기와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이 있다. 지적 겸손이다.
지적 겸손은 자신의 지식과 판단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감의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자신감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심리학자 마크 레리는 지적 겸손이 높은 사람들을 수십 년에 걸쳐 연구했다. 새로운 정보에 더 열려있고, 더 신중하게 판단하고, 반대 의견을 더 잘 들을 수 있고, 자신의 실수를 더 빠르게 인정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더 나은 판단을 내리고 더 신뢰받는 경향이 있었다.
지적 겸손이 약함이 아니라 강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있다. 지적 겸손은 자아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내 의견이 틀렸다는 것과 내가 틀렸다는 것을 분리하는 것. 이 분리가 되지 않을 때,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자아를 공격받는 것처럼 느껴진다.
틀릴 가능성이 있는데도 시도하는 것. 이것이 창조와 성장의 조건이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틀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틀릴 용기가 있어야 시도할 수 있고, 시도해야 실패할 수 있고, 실패해야 배울 수 있다. 이 연쇄가 성장의 구조다. 이 연쇄의 첫 번째 고리인 틀릴 용기가 없으면 나머지 모두가 막힌다.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이렇게 말했다. 전문가는 어떤 좁은 분야에서 가능한 모든 실수를 이미 저질러본 사람이라고. 전문성이 실수를 피하는 능력이 아니라, 실수를 통과하며 쌓인 것이라는 것이다. 충분히 많이 틀려본 사람이 비로소 그 분야를 깊이 아는 사람이 된다.
AI는 최적의 결과를 향해 설계된다. 불필요한 실수를 피하도록 학습된다. 그 효율성이 AI의 강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은 이 효율성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에서 온다. 돌아가는 길, 막다른 골목, 예상치 못한 실수. 이것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성장시키는 경로다.
틀릴 용기가 있다는 것은 틀렸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틀렸을 때 할 수 있는 반응들이 있다. 모른 척한다. 상황을 바꾸어 원래 자신이 그 방향을 의도했던 것처럼 만든다. 틀린 부분을 인정하되 다른 무언가를 탓한다. 그리고 가장 드문 반응이 있다. 내가 틀렸다고 말한다.
이것이 드문 만큼,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게 어떤 존재로 경험되는지를 생각해보자. 틀렸을 때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 새로운 증거 앞에서 기존의 입장을 기꺼이 바꾸는 사람. 이런 사람을 우리는 신뢰한다.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의 말이 오히려 더 무겁게 들린다.
역설이 있다.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신뢰를 잃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만든다.
나는 틀릴 용기가 있는가.
이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기 위해 최근을 돌아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기존의 내 입장을 새로운 정보 앞에서 바꾼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틀릴 가능성이 있는데도 새로운 것을 시도한 것이 언제인가.
이 질문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이 이미 하나의 답이다.
세상을 바꾼 것들 중 많은 것이 당시에는 틀린 것처럼 보였다. 지동설은 천동설이 당연한 세계에서 틀린 것이었다. 기존의 확신에 맞서 틀릴 용기를 낸 사람들이 그 확신을 바꾸었다.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도 이 구조는 같다.
틀릴 용기가 있는 사람은 더 자주 틀린다. 하지만 더 많이 배우고, 더 빠르게 성장하고, 더 깊이 생각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틀릴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이 있는데도 내딛는 것에서 나온다.
이 글은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살게 하는가》에 담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무우인간 : 바카라에 담지 못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