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해요"라는 달콤한 협박
가장 튼튼한 몸을 지녔어야 할 20대 중반쯤에 하필 나는 대학병원 간호사로 일을 했고 그로 인해 날이 갈수록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교대 근무로 규칙적인 취미 생활은 불가했고 내가 생각해 낸 스트레스 해소법은 시원한 맥주 공급과 매운 음식 섭취뿐이었다. 퇴근할 때면 힘이 쭉 빠졌고 왠지 배고파졌다. 편의점 네 캔 만 원짜리 맥주만이 나를 달래주었다. 건강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고 점점 허약해졌다.
몇 번 운동해보려고는 했다. 병원 바로 앞 요가원을 등록했다가 까칠한 원장님의 훈수에 기분이 상해서 한 달 나가고 말았다. 집 앞 헬스장도 나가볼까 했는데 내가 구경거리도 아니고 자꾸 흘긋거리고 심지어 대놓고 쳐다보는 아저씨들이 불편해서 더 안 나갔다. 테니스를 배워볼까 싶어서 검색해 봤더니 고정된 요일과 시간에 나가야 해서 교대 근무자가 할만한 운동은 아니었다.
항상 운동을 취미로 삼는 친구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고 추천을 부탁했더니 그 친구는 바로 30분 순환운동을 이야기했다.
"30분만 운동하면 된다고? 나한테 딱이잖아."
심지어 여성 전용이라 마음이 편했다. 더군다나 한 지점을 등록하면 세계 어느 지점이든 이용 가능하다니 본가가 지방이라 자주 집을 떠나기도 하는 나에게는 딱이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클럽이 도보 30분 거리였지만 모든 조건이 마음에 들어서 바로 등록하러 갔었다.
보라색 운동 기구가 동그랗게 배치돼 있었고 기구와 기구 사이에는 납작한 보드가 깔려 있었다. 30초 간격으로 "땡"하고 알람이 울리면 운동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내려와 오른쪽의 기구나 보드로 이동해 다른 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을 두 바퀴 돌고 나면 딱 30분 소요된다는 클럽 매니저의 설명을 듣다 보니 운동 효과에 의문이 생겼다.
'에이, 고작 30초 운동하고 어떤 효과를 볼 수 있나? 시시하겠는데.'
이 정도는 쉽겠단 생각으로 운동을 시작했는데 30초마다 울린다는 알람이 고장 난 게 분명했다. 운동 기구에 올라가면 한 2분 있다가 종이 울렸고, 보드에 서서 걸으려고 하면 10초 만에 종이 울렸다!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시간이 기이하게 흘러가는 수상한 장소였다!
기이한 시간의 흐름에 갇힌 느낌이 들 때쯤 딱 한 바퀴를 돌았고, 나는 그대로 원형을 이탈해 버렸다. 그리고는 구석으로 가 쭈그려 앉았다. 클럽 매니저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내게 왔다.
"괜찮으세요?"
이거 돈 낸 기간까지만 나오고 말아야겠다.
"어지러워요."
창피해서 원. 이렇게 쉬워 보이는 운동 조금 하고 이렇게 어지럽다니, 얼굴 들고 있기 창피했다.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매니저는 나를 편안하게 눕힌 후 베개를 다리 밑에 두어 다리를 올려두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실 필요 없으세요. 오늘은 조금 누웠다 쉬고 집에 가시고, 다음번에 오셨을 땐 아주 천천히 느린 속도로 해봅시다."
나와 또래로 보이는 매니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긴 했는데 속으로는 갈등이 일어났다. 이대로 돈을 기부해 버릴 것인가, 창피한 걸 참고 몇 주만 더 나와볼 것인가.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태연히 누워있으니 사람들이 지나가며 한 번씩 쳐다봤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창피와 모욕은 대학병원 신규 간호사 시절 숱하게 겪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일상이었다. 돈이 더 아까웠다.
아까워서 딱 몇 개월만 하려고 했는데 조금씩 좋아지는 체력이 더 아까웠다. 그래서 조금씩만 돈을 더 냈다. 처음엔 두 바퀴 운동하고 나면 힘겨웠다. 그런데 체력이 좋아지니 두 바퀴 운동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바퀴를 더 돌거나 운동 강도를 높여볼까 고민하던 찰나, 매니저와 그의 친자매인 트레이너가 추가 운동을 권유했다.
순환운동 기구가 배열된 곳 옆에 여윳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고 스쿼트 같은 맨 몸 운동을 하다 간다. 그 사이에 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무슨 운동을 하나 힐끔 쳐다보기만 했는데 드디어 나도 저 사이에 끼는 건가?
트레이너는 내게 스쿼트를 10개만 해보라고 했다. 그때의 나는 난생처음 해보는 스쿼트였다. 간단해 보이는 동작이었는데 한 번 할 때마다 괴로웠다. 허벅지가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자세가 아니라고 바꿔준다. 그래서 제대로 된 자세로 딱 하나 했는데, 그 하나 하는데 다리가 덜덜 떨렸다.
고작 10개를 했는데 2~3일은 내내 허벅지가 아팠다. 다시는 스쿼트가 하기 싫어졌다. 하지만 그때쯤 SNS에서 스쿼트의 효과가 어쩌고 애플힙 만드는 법 어쩌고 이런 걸 봐버렸다. 어쨌든 트레이너의 말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15번 해보세요."
"하.. 다섯 번을 더 하라고요..? 제발요."
12번째쯤 됐을 때 트레이너와 눈이 마주친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살려주세요."
"회원님, 하실 수 있으세요! 파이팅."
"제발..."
어쨌든 해냈고 좀 나아지는 듯한 허벅지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20개 하라고 하겠지? 각오하자.'
"회원님! 15번만 하세요."
"와, 정말요?"
기쁜 마음으로 15번의 스쿼트를 마친 나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다 했어요."
"네. 잘하셨어요. 이제 10개 더 해보세요."
"네?"
"물 마시고 좀 쉬시고 10개 더 해보세요."
"아니, 10개라뇨. 진짜..."
징징거리며 못하겠다니 트레이너가 내 옆에 와 섰다.
"같이 해요."
옆에서 같이 해주는데 더 징징거릴 수가 없었다. 트레이너는 나의 속도에 맞춰 함께 무릎을 구부렸다가 폈다가 하며 여유롭게 웃어주었다. 땀이 흘렀고 트레이너에게 친근감을 느끼다 못해 조금씩 우정이 느껴졌다. 함께 목표를 이룬 나의 동지.
그렇게 나는 스쿼트를 한 번에 200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스쿼트를 200개 하게 되니 나의 동지는 나에게 플랭크를 가르쳐주었고 내 옆에서 함께 플랭크를 해주었다. 처음엔 30초부터 시작했고 실패도 많이 했다. 버티고 버티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지만 트레이너와 함께 버텨보니 어느새 30초는 버틸 수 있게 됐다. 플랭크 30초를 마치고 물을 마시는 내게 나의 동지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30초 한 번 더 해보시죠, 회원님."
"아, 좀..."
"같이 해요."
물 마시는 쉬는 시간 줄 때가 좋았지,라는 말을 하게 될 줄은 모르고 몸을 벌벌 떨며 30초를 버텼다.
"회원님. 이번엔 쉬지 말고 1분 쭉 해보시죠."
"아, 제발요..."
"같이 합시다."
그렇게 내 버팀의 시간은 2분 30초까지 늘어났다.
내 인생 최고의 트레이너이자 나의 동지를 그 시점에 만나 천운이라 생각한다. 가벼운 운동 10분하고 어지러워하던 나는 스쿼트와 플랭크, 버피테스트 등의 맨몸 운동을 하나하나 배웠고 건강해져 갔다. 몇 주만 다니다 관두려 했는데 왠지 관두면 전과 같이 10분 운동하고 어지러워하는 사람이 될 것만 같은 두려움에 몇 년이나 붙잡고 있었다.
살기 위해 시작한 운동은 나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었고 내가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려줬다. 타고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조금씩 매일 하면 미세하더라도 나아진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 서툰 몸짓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되어 연대한다면 강해질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순환운동으로 다져진 체력을 기반으로 교대 근무를 하면서도 대학원 병행이라는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석사 학위 논문을 쓰며 "자기효능감"이란 개념을 마주하게 되었다. "자기효능감"이란 나 스스로가 무엇인가 해낼 수 있다는 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이 자기효능감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성공 경험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 시절 자기효능감에 대한 논문들을 읽으며 문득 깨달았다. 내 인생에서 자기효능감이 가장 뜨겁게 차 올랐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그건 멀리 있지 않았다. 매일 저녁 보라색 기구 옆에서 나의 동지와 함께 숨을 헐떡이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던 바로 그 서툰 시간들이었다.
그러니까 내 자기효능감의 첫 조각은 보라색 기구 옆 구석에서 사시나무 떨듯 플랭크를 버티던 그 서툰 몸짓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하자"며 옆에 누워 손을 잡아주던 동지가 있었기에, 나는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다. 조금씩 매일 하면 결국 나아진다는 그 단단한 믿음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