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히는 걸 해야지!

John Singer Sargent. 좋아하는 일에 목적지가 생기면

by한이람




왜 이렇게 만들었어요?





미대입시 때 내가 응시한 대학교는 두 군데였다. 그중 한 학교는 평면과 입체, 두 과목을 준비해야 했다. 평면은 내가 잘하는 쪽이었고, 기복이 심한 입체가 골치였다. 그러다 학원 선생님이 내가 유난히 잘 만드는 형태 하나를 발견했다.


"너는 이걸로 밀어야 돼."


그 뒤로 1년 동안 백 번도 넘게 같은 형태를 만들었다. 지금도 눈 감고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시험장에서도 그걸 만들었다. 그날을 위해 그렇게 연습한 거니까.


다른 사람 눈에도 괜찮아 보였던 모양이다. 면접에 가자 한 교수가 '형태가 조형적으로 아름답다'라고 했다. 그리고 물었다.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어요?"


당연히 합격하려고 만들었죠.


물론 그렇게 대답하진 않았다. 예상 질문이었고 준비해둔 답도 있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슬라이드에 떠 있는 내 작품이 완전히 남의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수도 없이 만든 모양인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학교에 떨어졌다.




이 남자 때문이다


다행히 다른 학교에는 붙었습니다만, 아무튼 그 뒤로도 나는 한 번씩 생각했다. 그걸 그렇게나 연습하지 않았다면 난 그날 뭘 만들었을까? 그때는 입시니까 그러려니 했다.


합격이라는 목적지가 있었으니까.

잘하는, 안전한 걸 하는 게 당연하다고.


그 기억이 다시 떠오른 건 순전히 이 남자 때문이다.



Self-Portrait (1907), John Singer Sargent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라는 남자.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대서양 양쪽의 상류층이 앞다퉈 초상화를 맡기던 화가다. 그가 죽었을 때, 언론은 그를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남자는 쉰 살을 갓 넘긴 1907년에 선언한다. 초상화는 이제 그만 그리겠다고.


잘나가는 초상화가가 초상화를 그만둔다니. 그동안 억지로 그렸던 건가? 시계를 돌려보면 그건 전혀 아니다. 젊은 사전트에게 초상화는 가장 서고 싶은 무대였다.


미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유럽을 떠돌며 자란 그는 열여덟 살에 파리로 건너갔다. 당시 잘나가던 초상화가 카롤루스 듀란(Carolus-Duran)의 화실에 들어갔고, 3년 만에 살롱에 데뷔했다. 해마다 열리는 국가 공인 전시회인 살롱은 화가가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가장 큰 무대였다. 거기서 스승을 그린 초상화로 상도 받았다.


그림 주문도 슬슬 들어왔고, 이대로만 가도 충분했을 거다. 그런데 이 청년은 더 큰 걸 원했다.




엄청난 재능의 남자라고 전해주세요


당시 파리 사교계에는 유명한 미인이 하나 있었다. 비르지니 고트로(Virginie Gautreau). 루이지애나 출신의 미국 여자로, 라벤더빛이 도는 창백한 피부에 귀를 붉게 칠하는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했다. 그녀를 그리고 싶다는 화가들이 줄을 섰지만 줄줄이 퇴짜를 맞았다.


사전트도 그 줄에 섰다. 그는 지인에게 편지를 써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자기가 엄청난 재능을 가진 남자라고!

꼭 좀 전해달라고. (자기 입으로...)


모두가 그리고 싶어 하는 미인이니 그도 그리고 싶었을 거다. 그런데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다. 사교계의 셀럽을 그려 살롱에 걸면 화제가 될 거고, 그럼 초상화 주문도 늘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한마디로 먹힐 거라고 본 거다.


그렇게 2년을 졸랐고, 1883년 고트로는 마침내 승낙했다. 파리에 온 지 9년, 사전트가 스물일곱이었던 해다.



그런데 고생은 여기서부터였다. 고트로는 가만히 서서 모델을 서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파리에선 사교 모임에 정신이 팔려 그림이 거의 진도를 못 나갔다. 여름엔 사전트가 아예 브르타뉴에 있는 그녀의 별장까지 따라갔지만, 거기서도 손님 맞으랴, 네 살 딸 돌보랴, 그녀는 금방 지루해했다.


사전트는 이렇게 투덜댔다.

그릴 수 없는 미모에 구제불능의 게으름.


너무 예뻐서 담기 어렵고, 가만히 있질 않아서 못 그리겠다는 얘기다. 그래도 포기하진 않았다. 연필로, 수채로, 유화로. 잔을 들고 건배하는 모습까지, 이런저런 자세로 습작만 30점 가까이 그렸다. 그렇게 해를 넘겨 완성한 그림이 이거다.


Portrait of Madame X (1884), John Singer Sargent


몸은 정면에 고개는 옆으로. 새까만 드레스와 창백한 피부. 그림엔 드레스 끈이 어깨에 얌전히 걸려 있지만, 처음엔 오른쪽 끈이 흘러내려 있었다.


1884년 살롱, 이 그림은 정말 먹히긴 했다. 아주 잘근잘근 씹혔다.


개막 날, 그림 앞은 하루 종일 북새통이었다. 함께 간 친구 랠프 커티스는 그날 풍경을 편지에 적었다.


어머, 저기 그 '미인' 납셨네!
세상에, 끔찍해라!


저속하다. 외설적이다. 가뜩이나 이런저런 소문이 따라다니던 사람이었는데, 흘러내린 끈이 그 소문을 확인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고트로의 어머니는 울면서 작업실까지 찾아와 그림을 내려달라고 했다. 내 딸은 끝났다고, 온 파리가 비웃고 있다고. 사전트는 그녀가 평소 입고 다니는 모습 그대로 그렸을 뿐이라며 버텼다.


명성 대신 악명을 얻은 그는 아무래도 파리보다 런던이 활동하기에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넜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림을 챙겨서. 이 그림과는 30년 뒤에 한 번 더 만나게 된다.




하루 몇 분, 두 번의 여름


런던에서도 초상화가로 자리 잡는 건 쉽지 않았다. 그렇게 맞은 1885년 늦여름, 사전트는 친구와 템스강으로 보트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사고를 쳤다. 다이빙을 하다 말뚝에 머리를 찧은 것이다. (파리에선 그림이 씹히고, 런던에선 머리를 찧고. 되는 일이 없다.) 친구는 그를 코츠월즈의 작은 마을 브로드웨이로 데려갔다. 거기서 좀 쉬라고.


그런데 다친 와중에도 머리에 남은 장면이 하나 있었다. 보트 여행 중에 본, 나무와 백합 사이에 매달린 종이 랜턴들. 사전트는 요양하러 간 친구네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빛이었다. 그가 원한 건 해가 넘어가고 랜턴에 불이 들어오는, 하루에 딱 몇 분뿐인 저녁이었다. 그래서 매일 저녁 이젤과 아이들을 세워놓고 그 몇 분을 기다렸다.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전트 (1885)


하루에 2~3분. 빛이 사그라들면 붓을 내려놓고 테니스를 쳤다. 다음 날이면 전날 그린 걸 대부분 긁어내고 다시 시작했다. 함께 지내던 친구는 아침마다 캔버스를 보면 전날의 작업이 사라져 있었다고 기억했다.


꽃이 시들면 화분을 들여와 채웠다. 9월에 시작한 그림은 11월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고, 이듬해 여름 같은 마을로 돌아와 같은 일을 또 반복했다. 붓을 놓은 건 1886년 10월이었다.


누가 맡긴 그림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사전트는 꽃을 좋아했고, 인공 불빛이 만드는 효과에 꽂혀 있었다. 그게 다다.


제목은 즐겨 부르던 노래의 후렴에서 따왔다.

Carnation, Lily, Lily, Rose.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Carnation, Lily, Lily, Rose (1886), John Singer Sargent


푸른 저녁 사이로 종이등과 꽃이 빛을 껴안고 있다. 그 사이에서 두 아이는 등에 불을 붙이느라 정신이 없다. 막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의 공기를 붙잡아둔 것 같달까.


1887년, 이 그림은 로열 아카데미 전시에 걸린다. 호평과 혹평이 엇갈렸지만 결과는 분명했다. 로열 아카데미 회장이 밀어붙여 국가가 곧바로 이 그림을 사들였다. 런던에서 거둔 그의 첫 성공이었다.




No more paughtraits

Mrs. Carl Meyer and Her Children (1896), John Singer Sargent


그가 초상화가로 처음 제대로 자리를 잡은 곳은 미국이었다. 1887년과 1889년, 미국에 건너간 해에 초상화 주문이 쏟아졌다. 그리고 1900년, 사전트는 대서양 양쪽에서 손꼽히는 사교계 초상화가가 되어 있었다. 파리에서 그렇게 바라던 그것이었다.


그런데 초상화는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다. 모델이 적어도 대여섯 번은 와서 앉아야 했으니. 많으면 열세 번을 온 부인도 있었다. 붓을 놀리면서 모델의 말동무까지 해줘야 했다. 다 그려도 끝이 아니었다. 다들 여길 더 고쳐달라, 이렇게 좀 해달라 한 마디씩 얹었으니까. 주문을 좀 줄여보려고 값도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1907년, 사전트는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1884년 살롱에서 그 소란을 같이 겪었던 랠프 커티스였다.


No more paughtraits.

초상화는 그만.(철자까지 비틀어가며 썼다.)

진저리가 나서 더는 안 그린다고. 특히 상류층은.


이런 말도 했다. 대문이든 울타리든 헛간이든 그려달라면 기꺼이 그리겠다고. 사람 얼굴만 빼고. 그래도 그려달라는 사람들에겐 목탄 초상을 내밀었다. 목탄 작업은 몇 번씩 앉아야 하는 유화와 달리 두세 시간이면 끝났다. 사전트는 이걸 머그(mug)라고 불렀다. 우리말로 하면... 낯짝 정도? 그렇게 그린 낯짝이 750점쯤 된다.


Heaven (1903-1916), John Singer Sargent © Boston Public Library


가끔 예외를 두기도 했지만 J. P. 모건의 초상화마저 거절했다. 대신 보스턴 공공도서관의 벽화를 그렸고,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며 햇빛 아래 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1916년. 사전트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장에게 편지를 보낸다. 관장이 몇 년째 달라고 했지만 끝내 내주지 않던 그림이 있었다. 32년 전 파리에서 씹히고, 20년 넘게 내놓지 않았던 그 그림.


2년을 졸라서 그린 그림을, 이번엔 미술관이 몇 년을 졸랐다. 그림을 넘기며 그는 덧붙였다.


아마 이게 내가 그린 것 중 최고일 겁니다.


조건도 달았다. 모델 이름은 붙이지 말아 달라고. 예전에 그 부인과 한바탕 일이 있었으니까. (고트로는 그 전해에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래서 그 그림은 알파벳 하나를 달고 미술관에 걸렸다.


마담 X.






같은 초상화다. 한 장은 2년을 조른 끝에 그렸고, 파리가 비웃었는데도 32년 뒤 자기 최고작이라고 했다. 나머지는 줄 선 손님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그렸는데, 끝내 진저리가 나는 일이 됐다.


같은 반복이다. 아니, 반복으로 치면 오히려 카네이션 쪽이 지독했다. 저녁마다 2~3분 붓을 들고, 아침마다 긁어내고, 해를 넘겨 다시 또.


그런데 지긋지긋해진 건 초상화 쪽이었다. 처음엔 그걸로 성공하고 싶었던 일인데도.


반응이라는 건 오래 남는다.

뭐가 먹혔는지, 누가 뭐라고 했는지, 내가 뭘 잘하는지. 그 기억이 다음 선택에 섞여 든다.


먹히는 걸 해야지.

안전하니까. 적어도 망치진 않을 테니까.

어느새 묻지도 않고 고르는 답이 된다.


시험날 그 모양이 아니었다면 난 뭘 만들었을까? 그게 뭐였든 '조형적으로 아름답다'는 말까지 들었을 것 같진 않다. 어쩌면 완성을 못했을지도 모르고.


그 아름다운 모양은 아직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다시 만들어보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사전트도 그랬던 게 아닐까.


두 번의 여름을 쓴 이 그림은 달랐겠지만.





※ 참고한 자료

[The Met] Madame X (Virginie Amélie Avegno Gautreau)

[The Met] From the Archives: How Madame X Came to The Met

[MFA Boston] John Singer Sargent Biography

[Tate] How John Singer Sargent painted Carnation, Lily, Lily, Rose

[Tate Etc.] Story of an Artwork: John Singer Sargent's Carnation, Lily, Lily, Rose

[The Magazine Antiques] Sargent's portraits in charcoal at the Morgan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John Singer Sargent and His People (Jean Strouse,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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