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hard Richter. 리히터도 리히터를 다 모른다
최애는 모네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는 구상화보단 추상화를 좋아하는 쪽이다.
마크 로스코, 클리포드 스틸, 제여란.
색과 선과 면 자체가 주는 에너지.
추상만이 깨울 수 있는 감정이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런 나도 추상화의 가격표 앞에선 가끔 할 말을 잃는다.
500억 원.
이 가격에 동의하시는지?
우리가 동의하지 않아도 이미 그 가격에 팔린 그림이다.
다수결로 작품값을 매길 수 없다는 건 나도 안다. 그래도 잠깐만. 고흐의 《해바라기》와 비슷한 가격이라고 하면? 해바라기는 적어도 어디 걸어도 무난하게 어울린다. 풍수에 좋다고도 하지 않나.
...한심하게 들릴 수 있겠다. 애초에 아트 옥션이 나 같은 비전문가가 섣불리 논할 생태계도 아니다. 시장에는 시장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그런데 작가 본인도 그 가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방금 본 문제의 500억짜리 추상화를 그린 사람이다. 가장 비싼 가격에 작품이 거래되는 현존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리히터 자신은 자기 그림에 붙는 가격을 탐탁지 않아 한다.
집값을 훌쩍 넘는 가격표가 붙은 자신의 그림 앞에서 리히터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I like it, but it's not a house. It's not fair.
저도 제 그림이 좋지만, 이게 집은 아니잖아요.
이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돈이라는 게 더럽다(Money is dirty)'는 말까지. 그의 반응에서 흥미로운 건 도덕성이나 윤리의식보단 거리감이다. 그림을 그린 사람, 그리고 그 그림에 500억이라는 숫자를 붙인 사람 사이의 거리.
작가는 캔버스의 크기를 정할 수 있다. 뭘 그릴지 고르고, 색을 마음대로 조합할 수 있다. 그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덮거나 찢어버릴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것들이 뜻대로 움직인다. 적어도 작업실 안에서는.
그런데 작품이 작업실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달라진다. 누가 갖게 될지, 어느 미술관 벽에 걸릴지, 누구의 무엇과 비교될지, 얼마에 팔릴지. 어느 순간 그림에는 작가가 붙이지 않은 숫자와 수식어가 잔뜩 달린다.
현존 최고가 작가, 살아있는 신화.
현대미술의 거장.
정작 그 수식어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내가 그린 그림이 왜 집보다 비싸지?" 하고 있는데도.
가격만 그런 게 아니다. 작품의 의미 역시 비슷한 길을 걷는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작품을 만들었는지와는 별개로, 일단 전시장에 걸린 뒤부터는 보는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를 붙인다. 평론가는 미술사의 좌표를 찾고, 관객은 자기 경험을 겹쳐보고, 시장은 가격을 매긴다.
리히터는 그 일이 쉽지 않은 작가다.
그의 작업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같은 작가의 것이라고 생각지 못할 만큼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옮겨 그린 듯한 회화가 있는가 하면, 화면 전체를 선으로 밀어붙인 추상화가 있다. 회화를 벗어나 사진, 거울과 유리, 스테인드글라스까지. 경계가 없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사람들이 공통점을 찾기 시작한다. 뭐가 반복되는지, 무엇이 리히터다운 것인지.
리히터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체계도, 어떤 경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어떤 강령도, 어떤 양식도, 어떤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관성이 없고, 충성심도 없고, 수동적이다. 나는 무규정적인 것을, 무제약적인 것을 좋아한다."
'나도 내가 뭘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근데 그게 좋음.'
대략 이런 말인 건가? 난감한 답이다. 그렇다면 사실 "리히터는 이런 작가입니다"라는 문장을 만드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일관성이 없다? '일관되게 일관성을 거부하는 작가'라고 볼 수 있다. 양식이 없다는 태도마저 하나의 양식이 된다. 사진과 회화, 구상과 추상, 재현과 우연 사이를 오가는 작업들에서는 다시 '불확실성' 또는 '이미지를 믿을 수 있는가?' 같은 공통의 질문을 찾아낸다. 리히터가 자신을 규정하는 문장을 하나 부정하면, 그 부정에 더 정교한 의미를 써넣으면 되지 않나.
리히터 입장에선 멀미가 날지도? 하지만 의미 없는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흩어진 작품들을 수십 년에 걸쳐 함께 바라보면 정작 작가에게는 보이지 않던 게 보일 수도 있다. 작가는 작품 하나씩 만들었지만, 미술사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펼쳐놓고 연대기처럼 보니까.
그런 식으로 작가 리히터라는 또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진다.
작년, 프랑스 파리에서 리히터의 역대 최대 회고전이 열렸다. 그러나 리히터는 전시장에 오지 않았다. 여생을 그림 그리는 데 쓰려한다고. 올해 94세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전시장에 갈 때마다 기자들에게 자꾸 비슷한 질문을 받고, 전에 했던 말과 답이 좀 달라지면 미술사학자들에게 지적을 받는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작품만 기록되는 게 아니다. 말과 행동도 함께 쌓인다. 영상 매체가 흔해진 요즘 같은 세상엔 더 쉽다. 이 그림을 왜 그렸는지, 이 주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어떤 작가라고 생각하는지.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면 작품 못지않게 방대한 '작가 자신'의 아카이브가 생긴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은 아카이브처럼 보존되지 않는다. 몇 년 전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고, 지금은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별일 아니다. 그런데 이름이 미술사에 들어간 순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3년 전엔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증인으로 소환될 수 있다. 90대 노인에게는 조금 가혹한 일이다. 과연 유명인이 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다.
리히터는 2009년 한 인터뷰에서 딸을 그린 방식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화가일 뿐이다. 말로 전하고 싶었다면 작가가 됐을 것이다.
그런가? 글이라고 자기가 쓴 말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건 아니다. 문장이 그림보다 설명적일 수는 있어도, 그게 해석에서 자유롭다는 뜻은 아니다.
소설가들은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이 장면은 무슨 뜻인가요?
이 물건은 무엇을 상징하나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그런 질문을 부르는 쪽이다. 우물, 고양이, 그림자, 양 사나이, 꿈. 하루키 세계관에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미지가 많기 때문이다. 독자는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그러나 하루키를 비롯해 많은 문학 작가들은 이런 질문에 명쾌한 답을 해주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하루키가 스스로 바카라 끝에 미주(尾註)로 상징 해석을 달아두는 것도 웃긴 일이다.
주.
(1) 고양이는 인간의 허무를 뜻합니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한 건 둘째 치고, 일단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든다.
비워둔 자리에는 해석이 생긴다. 누군가는 시대적 배경을 찾아 연결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결핍이나 욕망을 투사하고, 누군가는 다른 작품과 비교한다. 같은 문장을 읽고도 각자 전혀 다른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작품은 그럴 때 더 오래 산다.
덕후와 일반인의 차이는 작품을 볼 때가 아니라 작품을 보고 나서 드러난다. 일반인은 작품을 보고 나면 끝이지만 덕후는 작품을 보고 나면 그때가 시작이라는 거다. 무슨 말이냐고? 그냥 말 그대로다.
상황: 최애의 신작이 좋음.
1) 일반인: 와 이번 신작 미쳤다. (끝)
2) 덕후: 벅차오른다. 도파민이 폭발한다. 나무위키를 뒤진다. 위키피디아를 뒤진다. 유튜브로 해석 영상을 본다. 여러 개 본다. 작가의 다른 작품과 연결한다. 등장인물의 사소한 설정을 수집한다. 빈칸을 상상하며 덕후들끼리 수다를 떨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굿즈를 사거나 만든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
덕후들이 얼마나 멀리 가는지 알면 원작자가 놀랄 수도 있다. 가령 결승전을 보여주지 않고 끝난 《슬램덩크》를 붙잡고 전국대회 우승팀을 추리한다. 누가 시킨 적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덕후의 방식이다. 그 열정이 작가의 의도와 꼭 맞지 않더라도 작품을 왜곡한다고만 할 수는 없다. 작품이 만들어진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관객들이 이어서 살아가게 하기도 한다.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붓을 놓은 날 끝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도 마지막 문장을 쓴 날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배우가 연기하고, 다른 시대가 읽고, 패러디되고, 인용되고, 밈이 된다. 완성됐는데 끝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대로 유지되고 보존된 게 아니라서 그렇다.
물론 자신의 그림이 몇 센티미터 높이에서, 몇 미터 떨어져, 어느 정도 조도로 보여야 의도가 완벽히 전달된다고 믿는 로스코 같은 컨트롤 프릭... 아니, 섬세한 연출가 타입도 있다. 하지만 로스코가 그래 봤자 가구 쇼룸에 도배된 로스코 포스터를 보면 알 수 있다. 작품은 일단 세상에 나간 뒤부터 작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럼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나. 세상이 내 소중한 작품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소비하는 게 싫다면, 애초에 내놓지 않으면 된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냐고?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이 있다. 클리포드 스틸이다.
스틸은 미술계와 갈등을 겪은 뒤 상업 갤러리에서 물러났고, 생전 작품의 상당수를 시장과 대중에게서 거둬들였다. 작품을 팔더라도 전시 방식에 조건을 붙였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작품들이 한데 모여 독립적으로 전시되기를 바랐다. 리히터가 자신을 작품 옆에서 치웠다면 스틸은 작품 자체를 치운 것이다. 내놓은 자식을 통제할 수 없다면, 아예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방식이다.
정반대의 사람도 있다. 살바도르 달리는 작품 옆에 자기를 함께 내걸었던 작가다. 뾰족하게 말아 올린 콧수염, 기행에 가까운 퍼포먼스, 방송 출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키우고 이용했다. 스틸이 문을 걸어 잠갔다면 달리는 문 앞에 레드카펫을 깔고 조명까지 달았다고 해야 하려나.
작품을 숨겨도 그 의도가 해석되고, 작품 뒤로 물러나도 침묵에 의미가 붙는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면 그게 또 그 사람의 작품을 읽는 설명서가 된다.
사람들은 작품만 해석하고 끝내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다 보면 그걸 만든 사람까지 궁금해진다.
왜 이런 소재를 반복해 그릴까. 이런 문장을 쓰는 사람은 어떤 성격일까.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런 작품이 나왔을까. 작품에 붙이던 주석이 어느 순간 작가에게 옮겨 붙는다.
장 미셸 바스키아는 이 과정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미술계에서 그는 종종 '거리에서 등장한 본능적인 천재', '그래피티 작가' 같은 말로 불렸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미술사와 역사, 문학에 대한 참조가 빼곡했고, 당시 그를 알던 사람들도 그가 미술사에 해박한 작가였다고 기억한다. 그런데도 그의 작업을 지적인 구성보다 '날것의 본능'으로만 읽는 시선이 있었고, 그 배경에는 인종적 편견이 작동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바스키아 자신도 그래피티 작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작품을 설명하는 데 쓰이는 건 작가의 이미지뿐만이 아니다. 삶도 곧잘 가이드가 된다. 작가의 삶을 아는 게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설명력이 좋은 사건 하나를 발견했을 때다. 유명한 연애, 가족사, 사고, 질병, 성 정체성, 스캔들. 이야기가 강할수록 인간은 그걸 마스터키처럼 쓰고 싶어진다.
아, 그래서 이런 작품을 만들었구나.
실제로 맞는 경우도 있을 거다. 다만 열쇠 하나로 모든 문을 열려고 하면 곤란해진다.
지금은 이런 일이 이름난 예술가들에게만 생기지도 않는다. SNS에 일상을 올리고, 온라인카지노에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고, 댓글을 단다. 창작물 하나만 내놓았다고 생각해도 보는 사람에게는 그 옆의 프로필과 이전 글, 말투와 반응까지 함께 보인다. 무엇을 자주 말하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도 관찰 대상이 된다.
그 조각들을 주워 모아 한 사람을 조립한다. 작품에만 2차 창작이 생기는 게 아니다. 작가도 2차 창작된다.
리히터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가 남긴 수십 년을 펼쳐놓고 불확실성, 의심, 변화 같은 이름을 찾아냈다.
그것이 리히터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만들어낸 리히터라는 작품일까?
모르겠다. 어쨌든 작품은 혼자 돌아다니다 멈추지는 않는 모양이다. 온갖 해석과 별명을 단 채 종종 작가에게 다시 돌아온다.
"당신, 이런 사람이던데요?" 하고.
※ 참고한 자료
[Centre Pompidou] Gerhard Richter
[Clyfford Still Museum] Clyfford Still
[Fondation Louis Vuitton] Gerhard Richter
[Sotheby’s] Gerhard Richter: Off the Sca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Jordana Moore Saggese, The Basquiat Reader, Introduction
글 활용을 허락해주신 @배대웅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