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랑시에르의 미학적 무의식과 묵상에세이의 정치-관계적 의미
자크 랑시에르의 미학적 무의식과 묵상에세이의 정치-관계적 의미
1. 감각과 사유
글쓰기는 언제 시작되는가. 무엇인가를 느끼는 순간인가, 그 느낌에 어떤 개념이 달라붙는 순간인가, 아니면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감각인데도 자기를 스스로 흔들어 깨우는 바로 그 순간인가. 눈을 뜨면, 탁월한 주장을 규명한 소논문이 저명한 국내외 저널에 게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같은 저자의 새로운 바카라이 어느새 출간되었다는 출판사 홍보뉴스가 이어지며,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마다 한 주간 쏟아진 바카라들에 대한 정보가 신문 바카라 코너에 실려 또다시 밀려온다. 어제 태어난 바카라이 채 자라기도 전에 새로운 탄생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듯, 글은 글을, 바카라은 바카라을 재촉한다. 강물이 흐르는 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토록 빠른 흐름 속에서 인간의 사유는 과연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아니 깊어지고 있는가. 자신의 깊이를 누리기도 전에 다음 사유의 물살에 떠밀려 사라지고 있는가. 요컨대 나는 세상에 태어나는 글은 언제 잉태되는지가 늘 궁금하다. 바카라으로 나오기 전 얼마나 오래 묵혀졌으며, 어떤 침묵 속에서 발효되었고, 어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다가 비로소 문장이라는 몸을 얻었는지, 그것이 늘 궁금하다.
무엇보다 이처럼 다양한 글쓰기와 바카라이 쏟아지는 세계에서, 사유하는 인간의 모습은 왜 이리 옹색해지고 삶은 더욱 핍절해지는지도 알고 싶다. 글이 사유를 자극하고, 성숙한 사유가 삶의 방식을 일깨우며, 달라진 삶의 방식이 다시 삶의 윤리로 제시된다면, 왜 지금도 우리 세계는 예측불가능성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가. 해결되지 못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사유하고, 그 사유를 글로 쓰고, 그 글을 바카라이라는 형식에 담아 세계에 던졌다면, 그 던져진 존재로서의 바카라은 어디에서 어떻게 자기 생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수없이 많은 바카라이 쏟아져도 삶의 발이 어디를 디뎌야 할지 더욱 알 수 없다면, 글을 쓰고 읽는 일은 다시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보면, ‘저자’의 이름을 걸고, ‘출판사’의 이름을 내세워 바카라을 내고 글을 쓰는 이들에게, 그리고 그런 글들을 읽으며 다시 자신의 삶을 묻는 나에게, 글과 바카라의 생멸은 단순한 지적 사건이 아니라 사유의 윤리적 사건으로 다가온다.
이런 즈음에 랑시에르의 ‘미학적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사유하는 것이 이런 질문에 하나의 작은 해로(解路)를 열어준다. 아직 그의 철학적 개념을 더듬어 알아가는 중이지만, 그가 말하는 핵심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사고는 의식의 명료한 선언 이후에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사고는 이미 감각의 층위에서, 무의식의 어두운 결에서, 우리가 아직 사유라고 부르지 못한 것들 사이에서도 이미 수행되고 있다. 그는 이를 “사고하지 않는 것의 사고”, 혹은 “하찮은 것의 사고”라 부른다. 그의 말속에는 사유를 이루는 것은 명확하고 선명한 개념들만이 아니라 주변적이고 비가시적이며,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쳐지는 미세한 감각들에서도 발흥한다. 이것들이야말로 세계를 조직하는 또 다른 사유의 씨앗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글은 바카라으로 출판되기 위해, 어딘가에 발표하기 위해 첫 문장을 고심하며 꺼내는 순간보다 훨씬 앞서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어떤 글이든,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코 지나가는, 아니 겨우겨우 살아낸 어느 찰나, 문득 흔들린 감각, 설명되지 않은 불편함, 사라졌다고 믿었던 기억의 잔향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렇게 보면, 글쓰기와 바카라 출판이라는 최후의 결실은 한 사람이 살아오며 터득한 삶에서 조각해 낸 것들이 만들어낸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 수면 아래에는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한 채 살아낸 감각의 층, 말해지지 않은 사유의 골짜기, 아직 문장이 되지 못한 삶의 퇴적층이 엄청나게 묻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글과 바카라은 글 쓰는 이 자신의 삶이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축적된 결과물이다. 따라서 그 글들이 글을 읽어내는 타자의 삶에 조금이라도 유의미하게 기여하려면, 독자는 드러난 문장 아래 숨어있는 사유의 빙하를 더듬어야만 한다. 탈고(脫稿) 하기 위한 글쓰기의 힘겨운 수행만큼이나, 탈고(脫考), 곧 글을 읽기 전의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사유의 지난한 과정 또한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수적이다.
지금 나는 나를 분석하기 위해 이 글을 다시 쓴다. 내 글의 저자이면서 최초의 독자인 나에게 다시 묻는 것이다. ‘나의 글을 어떻게 감각하는지?’ 특히 지난 3월과 4월에 공개했던 ‘사순절 묵상’과 그 밖에 여러 에세이가 이 메타비평의 대상이다. 그 묵상문을 다른 이들에게 공개했던 이유는 ‘오늘날 기독교의 소멸’을 진중하게 되새겨보고자 함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소멸은 단지 교회 제도의 약화나 종교 인구의 감소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를 신앙의 감각으로 읽어내는 사유 능력의 말라버림, 경전을 읽으면서도 타인의 고통과 세계의 틈을 감지하지 못하는 영적 감각의 둔화, 갈수록 자기 안으로 ‘굽어지는 마음’이 굳어가는 고착상태, 더 나아가 기독교가 세계 안에서 다른 삶과의 관계 가능성을 열어주지 못하는 정치신학적 상상력의 쇠잔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소멸은 신앙이 사라진다는 것, 믿음의 명제가 부정되는 일만이 아니라, 세계를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배치하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의 깊이와 질서가 더 민감해지거나 정교해지지 않고 그저 무뎌지거나 한쪽으로 경도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의 사순절 묵상문이나 여러 에세이들은 교리의 확증이나 확정된 신학 진술을 답습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나의 확신을 가볍게 해체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따라서 묵상의 출발은 대부분 거대한 신학적 명제가 아니었다. 가볍고, 단순한, 하찮은 것들이었다. 어느 겨울, 고궁에서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던 문고리의 떨림, 산을 오르다 정상에 도달했을 때, 거친 숨 사이로 스며들던 미세한 숨결, 사순절을 앞두고 겨울 캠핑장에서 저녁 내 피웠던 화로대에 남겨진 재의 촉감, 깊은 밤, 사위가 고요한데도 잠들지 못한 밤 새의 울음으로 숲에 생겨난 침묵의 균열 같은 것이었다. 나는 묵상집에서 이런 작은 경험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나의 감각 속에서 일어나는 사유를 뒤따라가면서 글로 남긴 것이다. 다시 말해 곧 사라질 느낌을 글로 붙잡아 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묵상글들은 자기 안으로만 스며드는 내면의 경건 기록이 아니다. 나에게 익숙했던 것 사이로 무엇이 다시 낯설게 보였는지, 무엇이 새롭게 들렸는지, 무엇을 다시 감각했는지를 묻고 답하는 감각의 재배치였다.
오늘날 많은 글쓰기는 ‘내가 알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은 욕구’의 결정체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앎이 어디에서, 어떻게, 왜 발원했는지, 어떤 감각의 어둠을 지나 지금 이 문장에 이르렀는지는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니, 글을 쓴 이들이 그 앎이 어디서 발원했는지는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글의 시작과 그 사상적 기원이 관찰과 감각의 대상이라면 오늘날 내 앞에 까지 도달한 어떤 글에 대해서는 ‘다성적 감각’을 동원하여 그 글 속에 잠재된 감각을 다시 감촉해 보는 일은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글쓰기는 정치라는 구도 아래서 일어나는 관계성이라는 의미를 얻게 될 것이다.
관계를 새롭게 하는 정치적 태도는 묵상글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역설적으로 더욱 긴밀하다. 거대한 슬롯적 선언이나 제도적 언어 이전에, 인간은 먼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 속에서 타자와 관계 맺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묵상이 하찮은 것의 떨림을 통해 세계를 다시 통각하고, 그 감각의 변화는 관계의 변화를 예비하는 것이라면, 그런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정치-관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글과 바카라이 넘쳐나는 세계에서도 대립과 갈등이 빈번히 일어나는 문제 역시 ‘정치-관계성’에서 오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신앙에 기반한 묵상글, 에세이를 단순히 옹호하거나 회고하듯이 해설하는 데 있지 않다. 나는 그 글들 속에서 나의 사유가 어떻게 감각으로 먼저 발생했는지, 그 감각이 어떻게 신앙의 소멸을 감지했는지, 그리고 그 감지가 어떻게 다시 삶의 행동을 요청하며 실제 삶에서 실현되었는지를 스스로 되물으려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내 몸에 감지된 작은 경험을 먼저 찾는다. 그것을 통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메모로 남기고 나중에 확인한다. 그저 ‘말해 버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감각 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사유를 뒤따라가며, 곧 사라질 느낌을 문장 곁에 붙잡아 두려 한 것이다. 그 사유의 끝에서 나는 무엇을 새롭게 볼 수 있는가. 무엇을 다르게 느낄 수 있는가. 마침내 어떤 행동을 새롭게 실현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질문들이야말로 내가 나의 글을 서평 하는, 메타비평이 감당해야 할 나의 과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나의 삶에도 하나의 역설이 드러난다. 많은 글을 쓰고 있지만 나의 세계에서 정작 나의 삶을 바꾸는 사유의 힘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듯 보인다. 나를 둘러싼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다음 물음은 피할 수 없다. 왜 사유는 이토록 풍성해졌는데, 동시에 이토록 나와 세계는 그 관계성이 맥없이 소멸하고 있는가.
2. 역설: 사유의 풍성, 사유의 소멸
글은 보이지 않는 사유의 가시적 결정체다. 글쓰기는 그 결정체를 빚어내는 정치(精緻)한 공정이라 할 수 있다. 한때 우리는 지면과 펜이 넉넉하지 않아도 손으로 직접 글을 썼다. 200자 원고지의 칸에 글자 하나씩 채워가다가, 고쳐야 할 곳을 미처 고치지 못하면 종이 한 장을 과감히 버려야 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그런 글쓰기는 추억의 풍경이 되었다. 오늘의 글은 대부분 자판과 모니터 위에서 태어나고, 지워지고, 다시 고쳐진다.
바카라의 출판도 마찬가지다. 인쇄공이 글자 하나하나를 조판하던 시절은 이제 추억으로도 돌아오기 어려운 시간이 되었다. 오늘의 바카라은 전산 시스템을 통해 빠르고 정교하게, 때로는 화려하게 편집되어 세상에 나온다. 초판 부수는 줄었다고 하고, 독서 인구가 늘지 않아 아쉽다고도 한다. 1년에 한두 권의 바카라도 읽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은 시대라지만, 바카라은 여전히 거침없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온다. 바카라이 귀해서 독서가 환희의 순간이 되던 시대로부터, 바카라이 너무 많아 독서가 일상보다 더 가벼운 일로 여겨지는 시대로 우리는 빠르게 건너왔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바카라이 많으니 더는 사유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산다. 굳이 홀로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빠르게, 한꺼번에, 대량으로 쏟아지는 글과 바카라, 인터넷 플랫폼을 펼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넘쳐나는 글과 바카라은 역설적으로 사유의 즐거움을 나로부터 뿌리째 거두어가는 듯하다. 바카라이 사유를 돕는다는 오래된 명제는 이제 낯설고 특별한 문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생각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바카라을 더 필요로 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것이 반드시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무엇인가 조용히 소멸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충분히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런 시대이기에 내가 알고 있는 것, 새롭게 알게 된 것을 빠르게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욕구도 점점 커진다. 하지만, 촉박한 사유에서 파생하는 앎은 정작 자기 안에서 깊이 머물지 못한 채 빠르게 휘발된다. 사유를 위해 만들어진 바카라이 오히려 사유를 잃게 하고, 탈고(脫稿)를 위해 분투한 바카라이 여전히 진정한 탈고(脫考)에 이르지 못하는 역설이 오늘의 글쓰기와 독서 현실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어제 독서 나눔이 있었다. 이번 바카라은 최서영의 『어른의 품위』(2025)였다. 바카라을 선정한 분은 먼저 그 이유를 들려주었다. “가벼운 에세이”를 읽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가볍다’라는 말은 한편으로 좋은 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운 말이다. 짐이 가벼운 것은 좋지만, 살림이 가벼운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하물며 사유를 가볍게 하는 일이라면 어떤 이에게는 별 문제 아니지만, 실제로는 더욱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사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가벼운 바카라일수록 오히려 무거운 사유가 뒤따라야 독서의 가치가 살아난다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40대 중반의 저자가 자기 삶에서 관찰하고 경험하고 생각한 바를 한 꼭지당 서너 페이지 정도의 정갈한 글에 담아 들려주는 이 바카라에는 호감 가는 내용이 많았다. 나의 경우 한 시간 남짓이면 가볍게 읽어낼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럼에도 바카라장을 덮은 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오래 맴돌았다. 이 바카라이 나의 사유를 자극한 것이다. ‘어른은 어떤 사람이며, 품위란 무엇인가?’
사실 이 바카라은 ‘어른’의 기준이나 정의, ‘품위’에 대한 개념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진 않는다. 다만 그것을 글 곳곳에 흩어놓았을 뿐이다. 그래서 독자는 그 조각들을 따라가며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어떤 분은 이 바카라을 두고 “큰 고민 없이 따라가면 되는 바카라”이라고 정리했다. 대체로 모두가 그 말에도 동의했다. 다만 한 분은 이렇게 덧붙였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쓰는 것은 좋지만, 그 가벼움 끝에 어떤 질문이 남는지는 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다소 의외의 말이었으나 내가 생각한 말이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모든 가벼운 바카라은 나에게 오는 순간 더 이상 가벼움만으로 머물 수 없다. 그 바카라의 가치는 그것을 가벼운 에세이로 끝내버리지 않을 때 생기기 때문이다. 그 말 덕분에 나도 용기를 얻었다. 이 바카라을 읽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이 바카라의 제목을 거의 한 달 동안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오랜 시간, “도대체 어른의 품위란 무엇인가? 어른은 누구이며, 품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내 삶에서 되돌려 생각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그 질문은 이미 어른으로 살아가는 사람, 앞으로 어른이 될 사람, 혹은 나이와 무관하게 이미 어른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사유의 계기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바카라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실제로 어른의 품위에 대해 이상적일 만큼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대략 몇 가지 점을 정리했다. 우선 어른의 품위는 ‘여백의 태도’에서 나온다는 생각이다. 이는 곧 여백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일 수 있다는 뜻이다. 어른의 품위는 번쩍이는 성취나 세련된 외양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삶을 천천히 관조하고, 그 관조의 순간들을 자기 삶의 기록으로 남겨두려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나이만으로 사람이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래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삶이 저절로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나이 듦이 품위가 되기 위해서는 지나온 시간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보고 배웠는지 조용히 살피는 태도가 필요하다. 품위는 나이가 아니라 태도에서 나온다. 조금 더 살았다는 이유로 쉽게 가르치려 들거나 경솔하게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더 경청하고 더 겸손해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경험은 권위가 아니라, 더 조심스럽게 말하고 더 신중하게 판단하기 위한 재료가 되어야 한다.
품위 있는 사람은 자기 경험을 무기처럼 휘두르지 않는다. 그는 자기 경험을 오래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남길 것과 내려놓을 것을 가만히 구분한다. 또한 품위는 자신을 돌보는 데서도 시작된다. 타인의 시선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다. 순간의 행복을 끝없이 미루지 않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며, 나를 함부로 혹사하지 않는 태도 역시 어른다움의 바탕이다.
나아가 품위 있는 어른은 자기 삶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것은 거창한 자서전을 쓰는 일이 아니다. 오늘의 감정, 오늘의 부끄러움, 오늘의 작은 깨달음을 함부로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태도다. 그렇게 남겨진 기록은 나를 다그치는 채찍이 아니라, 나를 다시 살피게 하는 거울이 된다.
이처럼 오랜 시간, 이 바카라의 내용을 곱씹어본 덕분에, 어른의 품위는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와 함께 안으로 다져진 삶의 밀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완성된 인격의 훈장이 아니라, 과정의 상흔을 반복해서 견디는 일에 가깝다. 계속 배우고 단련하는 시간 속에서 천천히 배어 나오는 기운이다. 자기 삶을 관조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안다. 그렇기에 쉽게 단정하지 않고, 쉽게 미워하지 않으며,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품위는 말투와 관계 속에서도 드러난다. 마음가짐, 말투, 태도, 자세, 신념, 눈빛은 모두 한 사람이 자기 삶을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사람을 쉽게 재단하지 않고, 조금 더 다정하게 이해하려는 태도는 삶을 천천히 바라본 사람에게서 나온다.
이제 생각의 범위가 조금 더 확장된다. 이런 어른의 품위를 생각하다 보니 고대 지혜자인 코헬렛의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품위 있는 사람은 드러난 말보다 더 큰 숨겨진 사유를 가진 사람이다. 서둘러 판단하는 사람은 여백을 잃기 쉽다. 그러나 관조하는 사람은 타인의 삶에도 아직 말해지지 않은 사연이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쉽게 결론짓지 않는다.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듣고, 판단하기 전에 한 번 더 머문다.
이제 나는 ‘어른의 품위’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게 되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는 것, 그것도 어른다움이다. 우리는 완성된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실수하고, 후회하고, 흔들린다. 다만 예전보다 자신을 조금 덜 미워하게 될 때, 우리는 조금씩 성장한다. 품위란 흠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금 간 자신을 끌어안고 다시 나아가는 힘이다. 금 간 자리를 감추지 않고, 그 틈에 고인 시간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마음이다.
이처럼 어른의 품위는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균열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그 주제에 대한 사유가 발생한다. 어른의 품위는 자기 삶에 일어나는 틈을 관조하는 데서 깊어진다. 상처를 서둘러 봉합하지 않으려 하고, 어둠을 실패로만 읽지 않는 태도다. 삶에는 밝음만으로 다 말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그 진실은 때로 어두운 침묵 속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어른의 품위란 선을 지키되 그 선을 절대화하지 않고, 스스로 경계 위에 서는 태도다. 나를 아끼는 만큼 나 바깥의 세계를 끌어안고, 타인의 삶과 생각을 내 삶의 무게처럼 존중하며,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마음이다. 오늘의 자기 삶을 성실히 살아내면서도 타자를 향한 여백을 잃지 않는 의식, 그것이야말로 어른에게서 배어 나오는 아름다운 단단함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늙어감의 과정을 한 줄의 노래처럼, 한 장의 손편지처럼, 자기 삶의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품위에 가깝다.
3. 가벼운 바카라에서 길어 올린 무거운 주제 가볍게 짊어지기
이 독서 모임은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처음 제기했던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글쓰기의 풍성함과 바카라의 다양한 출판은 반드시 사유의 풍성함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사유는 그 자체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유가 자기 안에서만 맴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지적 장식에 머물 수 있다. 사유는 결국 삶의 태도가 되어 몸 밖으로 나와야 하고, 자기 삶이 타자의 삶 어딘가에 가닿는 윤리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바카라, 글쓰기의 가치가 완성된다.
그날 독서 모임에서는 이렇게 우리 생각을 넓혀 보았다.
어른의 품위가 한 개인의 교양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태도일 수는 있어도 충분한 윤리는 되지 못한다. 품위는 반드시 관계 속에서 시험받는다.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만큼, 내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중요하다. 내가 나의 상처를 함부로 미워하지 않듯, 타인의 삶에도 말해지지 않은 상처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 내가 내 삶의 균열을 조용히 들여다보듯, 타인의 세계에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어둠과 시간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 이것이 품위가 윤리로 확장되는 자리다.
그렇다면 바카라 읽기도 마찬가지다. 바카라을 읽는다는 것은 나의 앎을 더 많이 쌓는 일만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경계를 흔드는 일이다. 내가 옳다고 믿어온 생각을 다시 묻고, 내가 쉽게 지나쳤던 타인의 삶을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바카라은 나와 너, 나와 그것 사이에 놓인 경계를 조금씩 느슨하게 만든다. 때로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세워둔 울타리마저 다시 묻게 한다. 그러므로 독서는 나를 더 단단한 개인으로 세우는 동시에, 나를 넘어 타자와 세계를 향해 열리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이것은 저자의 집필 의식이어야 하면서도 독자의 바카라 읽기 윤리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바카라이 무한히 쏟아지는 세계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이유가 사라져야 한다는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바카라이 많다고 해서 곧장 세계가 평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바카라을 많이 읽는 사람이 반드시 더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바카라이 참으로 사유를 일으키고, 그 사유가 타자를 향한 여백으로 이어진다면, 바카라은 적어도 전쟁의 논리와는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전쟁은 대개 경계를 절대화하는 데서 시작된다. 나와 너를 나누고, 우리와 그들을 가르며, 옳음과 그름을 하나의 칼날처럼 세운다. 전쟁은 양식의 강탈에서, 사유의 고착에서, 경계의 확정에서, 좌우의 명확한 대립에서 발원한다. 다시 말해 삶의 여백을 무시하고 자기 사유만을 끝까지 지키려는 굳은 사고에서 일어난다. 반면 바카라은 우리를 그런 확증편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생존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바카라은 나의 앎을 너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도구만은 아니다. 단순한 지식의 저장고도 아니다. 모르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바카라의 역할이 끝났다고 말할 수도 없다.
바카라은 굳어지는 사유를 흔들어 그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 어제의 확신을 오늘 수정하게 하며, 나의 삶을 타인의 삶에 견주어 상상하게 하는 윤리적 자극이다. 좋은 바카라은 나를 더 확신에 찬 사람으로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너무 쉽게 확신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게 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 앞에서 잠시 침묵하게 한다. 그런 침묵 속에서 타인은 더 이상 내 판단의 대상만이 아니라, 내가 이해해야 할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것, 바카라을 출판한다는 것, 나아가 바카라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활자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생각을 되묻는 일이며,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나의 평안함을 스스로 어렵게 만드는 일이다. 나의 높은 지식을 너의 지식 앞에서 낮추는 일이며, 세계의 지정학적 경계선을 상상 속에서나마 조금씩 지워보는 일이다. 더 나아가 아직 오지 않은 공동체, 곧 서로를 함부로 적으로 만들지 않는 상상의 공동체를 미리 연습하는 일이기도 하다.
바카라이 많아진 시대다. 그러나 그만큼 사유의 깊이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읽은 것은 많으나 머문 것은 적고, 아는 것은 늘었으나 바뀐 삶은 드물다. 사유는 빠르게 소비되고, 확신은 더 쉽게 굳어진다. 그리하여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면서도 때로는 제자리를 맴돈다. 그러니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바카라의 양이 아니라 사유의 깊이다. 글의 풍성함이 사유의 풍성함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수많은 바카라 속에서도 여전히 가난한 정신으로 남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바카라은 사유를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사유는 결국 삶을 바꾸기 위해 존재한다. 그 변화가 나를 돌보는 일에서 시작해 타인을 환대하는 일로, 마침내 세계의 폭력을 줄이는 일로 나아갈 때, 한 권의 바카라은 비로소 자기 몫의 탈고를 성취한다. 바카라은 그때 단지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인간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조용한 힘이 된다. 이런 나눔 자체가 나에게는 이 가벼운 바카라을 통해 무거운 사유를 어렵지 않게 짊어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결론적으로 내가 이 가벼운 바카라에서 사유한 어른의 품위는 나에게 무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해볼 만한 무게이기도 했다. 기억할 것을 기억하고, 희망할 것을 끝내 희망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때 삶은 어느 저녁의 밥상처럼 조금씩 따뜻해질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여백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다. 그 따뜻함이야말로 내가 끝내 붙들고 싶은 어른의 품위다. 어른이면서도 여전히 아이의 미성숙에만 머물지 않는 것, 그러나 아이의 순전함마저 잃어버리지는 않는 것. 그 사이의 조용한 균형이 어른의 품위일 것이다. 결국, 바카라을 읽은 뒤 사유는 확고하다는 이름으로 ‘굳어버린’ 나의 의식을 전복하는 결과에 이를 때가 많다.
4. 미학적 무의식과 고정된 사유의 균열
중심을 전복하는 주변의 사유로서 글쓰기와 글 읽기의 가치를 일깨우는 데 있어 자크 랑시에르의 ‘미학적 무의식’ 개념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적 무의식이란 감각적 질서의 재편을 뜻한다. 다시 말해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들리며, 무엇이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가를 결정해 온 낯익은 질서가 흔들리는 순간을 가리킨다. 그것은 단순히 예술 작품의 해석 방식에 머물지 않는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기 시작하며, 의미 없다고 여겨지던 것이 세계의 중심으로 올라오는 감각의 사건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미학적 무의식은 ‘사고하지 않는 것의 사고’이자 ‘하찮은 것의 사고’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명확한 개념이나 언어로 포획되지 않은 감각의 층위가 이미 하나의 사유를 수행하는 상태다. 의미는 언제나 또렷한 진술이나 거대한 개념을 통해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때로 의미는 감각적 표면 위에서 먼저 분배된다. 보이지 않던 것, 들리지 않던 것, 말해지지 않던 것이 이미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드러낸다.
이때 본래 의미의 중심이 아니어야 할 하찮은 사물, 미세한 소리, 남겨진 흔적이 오히려 진실을 운반한다. 숭고한 중심은 주변의 미세한 잔여에 의해 교란되고, 진실은 바로 그 잔여의 자리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미학적 무의식은 단순한 미적 감수성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의 전환이며, 고정된 사유의 질서를 균열시키는 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의 사순절 묵상집에 등장하는 작은 문과 문고리의 이미지는 랑시에르의 미학적 무의식과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면이다.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문”, “겨우 조그만 문고리 하나가 바람에 흔들릴 뿐”인 장면에서 문고리는 본래 통과를 돕는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건물의 중심도 아니고, 사건의 주인도 아니다. 문고리는 그저 문을 열고 닫게 하는 작은 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묵상은 바로 그 하찮은 문고리의 떨림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금속의 미세한 소리,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진동이 사순절 전체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계시나 장엄한 선언이 아니라, 조그만 문고리의 기척이 사유를 촉발한다. 여기서 감각의 위계는 뒤집힌다. 중심의 계시가 더는 중심에만 머물지 않고, 주변의 기척이 오히려 진실을 매개하는 통로가 된다. 랑시에르의 언어로 말하자면, 감각의 질서에서 주변부에 놓여 있던 것이 중심으로 올라오며 새로운 사유의 배치를 만들어내는 순간이다.
이처럼 나의 묵상에서 사유의 전환은 거대한 개념이 아니라 미미한 문고리의 흔들림에서 시작된다. 계시란 인간 밖에서 오는 가시적·비가시적 언설이며, 때로는 불가항력적으로 인간에게 도착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계시를 언제나 온전하게 소유하거나 보존할 수 없다. 오히려 계시는 미세한 사물의 진동, 낮은 소리, 거의 보이지 않는 감각적 잔여를 통해 인간의 사유를 호출할 때 실감한다. 그런 점에서 하찮은 사물의 떨림은 계시의 보편성과 일반성을 함께 드러내는 특별한 자리이기도 하다.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 개념보다 기척과 표정이 더 깊이 사유하는 장면도 이와 연결된다. “소곤거리는 말”, “세미한 음성”, “지나가듯 흘리는 말”, “숨결에 묻어 새어 나오는 소리”는 아직 완전한 의미를 갖춘 언어가 아니다. “말보다 작은 표정의 음성”이나 “숨결에 묻은 부르심” 역시 명료한 개념으로 정리되기 이전의 감각이다. 바로 그 미완의 감각 속에서 가장 또렷한 부르심이 들린다.
글을 쓸 때, 나의 의식이 “이것이 의미다”라고 선언하기 전에, 이미 감각적인 것이 사유를 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의미는 더 이상 완결된 문장에만 귀속되지 않는다. 언어가 되기 이전의 기척, 문장으로 굳어지기 이전의 숨결, 개념으로 명명되기 이전의 표정에서 이미 깊어지고 있었다. 바카라으로 출판된 큰 사유가 우리를 일깨우기도 하지만, 그 바카라으로 쓰이기 전 저자의 작은 감각의 흔적들, 한 단어와 한 문장의 결 속에서도 이미 거대한 사유는 움트고 있었다. 이때 감각은 말 이전의 의미이며, 숨결과 표정은 하나의 인식론이 된다.
주변적 사물 역시 단순한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의 진실을 실어 나르는 매개가 된다. “작년 이맘때 내 손에 들려 있었던 나뭇가지가, 오늘은 재가 되어 내 이마 위에 얹힌다”라는 장면에서 ‘재’는 가장 보잘것없는 물질처럼 보인다. 그것은 남은 것, 타버린 것, 쓸모를 다한 것에 가깝다. 그러나 바로 그 하찮은 물질을 통해 인간의 필사성, 긍휼, 다시 시작되는 생명의 가능성이 드러난다. “화산재로 굳어진 돌길”과 “그 탁한 잿길 끝의 숲” 또한 재로부터 파생한 상상의 결실이다.
나의 사순절 묵상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재’의 재배치다. 재는 더는 단순한 잉여나 폐허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해석하는 중심이 된다. 랑시에르의 미학에 따르면 잔여는 단순한 찌꺼기가 아니다. 그것은 기존 질서가 배제했던 것들이 다시 의미를 획득하는 자리다. 그러므로 묵상은 재라는 잔여를 물질적 차원에서 복권한다. 재는 어떤 상징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를 드러낸다.
재는 재로서 사유의 대상이다. 바로 그 소멸의 흔적이 존재의 진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모든 것은 결국 타고, 사라지고, 재로 남는다.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때 감각의 질서는 근본적으로 뒤집힌다. 재는 더 이상 인간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추상적 소재가 아니다. 그것은 손으로 감각되는 흔적이다. 보드랍고도 까칠한, 사라짐과 남겨짐 사이의 모호한 감각이다. 따라서 사순절 묵상이 재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이 절기가 빛이 아니라 재를, 영광이 아니라 잿가루를, 완성이 아니라 잔여를 중심에 놓는다는 뜻이다.
완결된 위엄보다 남겨진 흔적과 미세한 불완전성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대목도 중요하다. “씻지 못한 손”, “조금 떨리고 있었던 손”, “여전히 흙범벅이었던 손”은 창조나 완성의 장면을 매끈한 영광으로 봉합하지 않는다. 보통 위대한 사건은 장엄함과 아름다움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묵상은 그 장면 한가운데에 아픔과 바카라임의 흔적을 남겨둔다. 환한 표정과 씻지 못한 손 사이에 흐르는 긴장은 바로 그 장엄함을 교란하는 잔여의 디테일이다.
완성의 미학은 흠 없는 표면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 난 손을 통해 다시 열린다. 그래서 창조는 완벽한 승리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바카라임과 아픔이 남아 있는 사건으로 다시 읽힌다. 이때 손의 떨림, 흙의 흔적, 씻기지 않은 잔여는 신학적 사유를 새롭게 배열한다. 창조주는 더 이상 높은 곳에서, 완결된 선언만을 내리는 분이 아니다. 그는 흙 묻은 손, 떨리는 손, 아직 씻지 못한 흔적 속에서도 자신을 드러낸다.
재의 이미지는 더 나아가 균열의 정치학을 촉구한다. 보이지 않는 가루, 날아가 버릴 미세한 먼지, 그것은 인간의 낮은 소리와 침묵의 힘이기도 하다. 이때 역사를 여는 힘도 다시 정의된다. 역사는 반드시 큰 외침이나 거대한 선언으로만 시작되지 않는다. “아주 낮은 소리가 흘렀다. 그 미세한 소리에서 침묵이 처음으로 금이 갔다”라는 문장은 하나의 미학 선언처럼 사유한 것이다. 역사는 대개 큰 사건, 큰 발언, 큰 결단을 중심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나는 어느 깊은 새벽, 벌레 한 마리의 가볍고 미세한 소리가 짙은 침묵을 가른다는 것을 들었다.
작은 것은 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표면을 처음으로 흔드는 힘이다. 랑시에르의 관점에서 이 미세한 소리는 감각적인 것의 질서를 재분배하는 최초의 균열이다.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기 시작하고, 보이지 않던 것이 감각의 장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세계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배열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란 감각의 균열에서 발생한다. 기존 질서 안에서 소음으로 처리되던 것이 말로 들리기 시작하고, 배경으로 밀려났던 존재가 중심의 자리로 이동할 때, 새로운 정치가 시작된다.
나의 묵상에서 재가 지니는 의미는 세계의 대한 각성과도 연결된다. 세계의 변화는 반드시 말하는 자에게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들으려는 자에게서 먼저 일어난다. 재를 본다는 것, 재의 먼지를 감각한다는 것, 침묵 속에서 낮은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이미 감각의 질서가 바뀌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사건은 여기서 정치적 균열로 확장된다. 종교적 침묵은 공백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언어가 붙지 않았을 뿐, 이미 의미로 가득 찬 상태다. 그 침묵을 깊게 만들고, 땅 아래 붙어사는 재 같은 미물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을 때, 세계는 조용히 경계를 넘어 원시 정원의 감각으로 재편될 수 있다.
침묵 역시 묵음이 아니라 소리의 확장이다. “침묵은 비어 있는 공백이 아니라 역사가 갈라지기 시작하는 균열의 자리”라는 진술은 침묵을 말 없음의 상태로 읽지 않는다. 침묵은 아직 말로 포획되지 않은 사유가 응축되는 자리다. 세상의 소음이 짙어질수록 그 틈에서 더 또렷한 진실의 음성이 떠오른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이 사실은 이미 세계를 조직하고 있었다는 통찰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침묵은 안식의 결단이며, 회개의 재정렬이고, 부활을 기다리는 신뢰의 시간이 된다.
마지막으로 얼굴, 눈, 표정, 몸의 흔적은 정확한 개념보다 더 깊은 진실을 남긴다. “그는 제가 들었던 어떤 소리보다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습니다”라는 문장은 말의 크기가 음량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어떤 단어를 말했는지도 중요하지만, 때로 진실은 단어 없이 더 깊이 남는다. “나는 단어 없이 그의 말을 남겨두는 방식을 택합니다”라는 태도는 사실을 단순히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남긴 감각적 진실을 그려내려는 시도다. 여기서 글쓰기는 기록을 넘어 회화적이고 미학적인 행위가 된다. 개념이 다 붙잡지 못한 진실을 얼굴의 흔적, 몸의 떨림, 표정의 잔광 속에 남겨두는 것이다.
요컨대, 나의 묵상이라는 글쓰기를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라는 개념으로 읽으면,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서정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에 기반한 정치 질서의 재편이며, 신학적 감각의 재구성이다. 이 글쓰기는 끊임없이 중심을 주변의 것으로부터 끌어온다. 문고리는 계시의 입구가 되고, 숨결은 의미의 중심이 되며, 재는 존재 이해의 핵심이 되고, 침묵은 역사적 균열의 자리가 된다.
정리하면, 이 구도는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신학적 질서의 재배치다. 창조주는 더 이상 높은 곳에서만 말하지 않는다. 그는 낮은 소리, 작은 사물, 미세한 감각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타버린 재가 그의 개입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고, 흔들리는 문고리가 사순절의 문턱이 되며, 숨결과 표정이 계시의 통로가 된다. 따라서 미학적 무의식에 근거한 감각의 재배치에 따르면, 이 묵상은 세 가지 급진성을 지닌다.
첫째, 계시의 장소를 중심에서 주변으로 이동시킨다. 둘째, 의미의 매개를 개념에서 감각으로 전환한다. 셋째, 진리의 형식을 장엄한 선언에서 미세한 떨림으로 바꾼다. 이때 사순절 묵상은 죄로 가득한 인간에 대한 미학이면서, 동시에 고립된 인간을 관계 안으로 다시 부르는 정치적 회복의 언어가 된다. 또한 인간의 사유에 기반한 철학에 응답하는 신학의 형식이 된다.
결국 미학적 무의식에 기반한 나의 묵상은 하찮은 것들이 진리를 운반할 권리를 복원한다. 진리는 더 이상 숭고한 것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찮은 것들도 진리를 말할 수 있고, 미세한 것들도 세계를 다시 배열할 수 있다. 그것들은 거대한 질서의 배경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중심을 새롭게 형성하는 감각적 사건이다. 랑시에르의 언어를 빌리면, 이것은 감각의 민주화를 수행하는 일이다.
그 민주화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한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먼저 세계를 바꾼다고. 보잘것없는 것이 진실을 열고, 미세한 감각적 사건이 세계의 배치를 다시 짜며, 숨겨진 사유가 감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우리를 부른다고. 그러므로 묵상은 큰 목소리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작은 것들이 이미 말하고 있음을 듣는 일이다. 문고리의 떨림, 숨결의 기척, 재의 먼지, 씻지 못한 손, 침묵의 균열, 단어 없이 말하는 얼굴 앞에 오래 머무는 일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고정된 사유는 금이 가고, 세계는 다시 감각되기 시작한다.(1/2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