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한국전쟁 후 76년
2 하나님의 영광은 일을 숨기는 것이지만,
임금의 영광은 일을 찾아내는 거야.
‘하나님이 여기 존재하신다’라는 것은
‘말씀으로 일어난 사건’을 베일에 감싸두었다는 것이고,
‘왕들이 여기 존재한다’라는 것은
‘말씀으로 일어난 그 사건’을
주도면밀하게 탐구하여 찾으라는 것이다. (잠언 25장 2절 다시 쓰다)
전쟁의 경험 너머
76년 전 그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렸고 사위는 흐릿했다. 만일 어느 맑고 화창한 아침이었다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조금 더 선명히 눈에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는 언제나 빛 아래 드러난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둑한 날 뒤편에도 우리 눈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 숱한 일들이 보이는 세계와 함께 공존한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정치는 보이는 현상을 붙들고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의미를 규정하려는 공적 대립이다. 정치인은 사건의 전모를 밝히겠다고 말하고,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밝히는 일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베일 속에 있던 것이 날것 그대로 드러날 때, 그것이 공동체의 기억과 분노와 판단을 흔들어놓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한국전쟁을 마주할 때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6월 25일. 어린 시절 우리는 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어찌 잊겠는가”를 불렀지만, 정작 그날에 대한 원천적 체감은 거의 없었다. 보이는 것도 없었기에 보이지 않는 것을 체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겪어보지 않았으면 아는 척하지 말라”라고 말할 때, 그 목소리의 무게는 쉽게 반박될 수 없었다.
경험은 분명 중요한 증언이다.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무너뜨리는지, 상대가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 직접 겪은 이들의 말은 결코 가볍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경험하지 않았으면 이해할 수 없다”라는 논리가 절대화될 때, 후대는 역사 앞에서 사유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직접 겪지 않은 세대는 과연 거대한 비극 앞에서 침묵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증언과 자료와 말씀과 역사의 흔적을 더듬으며 감추어진 뜻을 성실히 추적해야 하는가.
경험 너머, 사유의 바카라임
잠언은 바로 이 문턱에서 오래된 지혜를 건넨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히브리 본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영화’는 ‘하나님의 영광’이기도 하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 땅에 존재하신다는 신비의 증거’이다.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일들, 뜻을 알 수 없어 베일에 싸인 사건들, 그 감추어짐 자체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잠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왕의 영화’를 일깨운다. 이 ‘영화’ 역시 감추어진 일을 살피는 데 있다. 여기서 왕은 단지 권력의 자리에 앉은 통치자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질서 앞에서 공적 바카라임을 맡은 이들, 나아가 역사를 해석하고 공동체의 길을 물어야 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왕적 바카라무는 정치 지도자를 넘어 역사를 기억하고 해석하려는 시민, 신앙인, 공동체 모두에게 일정하게 주어진 바카라임이다.
사건의 말, 전쟁의 동기어
한편, 히브리어 ‘다바르’는 사전적 의미인 ‘말’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씀이 현실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사건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 말이 허공에 흩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역사 안에서 어떤 일로 나타났다는 증언이다. ‘말씀으로 된 사건’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감추어두신 뜻을 품은 역사적 현실이며, 인간은 그 베일을 열어 쉼 없이 묻고 관찰하며 탐구해야 마땅하다.
이 관점에서 어떤 사건은 그저 경험한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전쟁의 발단에는 상대를 압박하려는 정치 지도자들의 판단과 욕망, 계산과 확신이 놓여 있다. 이런 자기 욕망이 세계에 드러난 이념, 정치체제, 힘을 가진 나라들과 그렇지 못한 나라 사이의 국제정세의 불균형, 권력과 지배에 대한 쟁취라는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전쟁은 어떤 특정 정치가의 말과 명령, 판단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전쟁을 겪은 이들은 모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소용돌이 속으로 내던져진 셈이다. 이는 곧 그 일을 경험한 자만 해석할 수 있는 닫힌 기억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결국, 어떤 사건의 뒤에는 반드시 그 사건이 일어난 ‘말’, 즉 동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어떤 일을 경험하지 못한 후대가 그 사건을 함부로 모른 척하거나, 나와 무관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여기서 왕의 참된 과제이자 정치적 과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그 비극적 사건에 감추어진 정치적, 인간적, 신학적 진실을 주도면밀하게 찾아내는 일이다.
이에 대해 “한국 교회의 부흥과 한국 경제의 발전이 한국전쟁이라는 고난 위에서 일어났다”는 식의 단순 공식은 하나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평면화하는 위험이 있다. 고난 이후의 열매가 있었다고 해서 고난 자체를 쉽게 정당화할 수는 없다.
또한 “저들이 기독교인을 박해했으니, 그 이념에 속한 모든 사람은 영원한 적이다”라고 단정하는 태도 역시 위험하다. 그것은 복잡한 역사의 역학을 ‘기독교 대 반기독교’라는 흑백논리 안에 가두어버린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는 분명한 가해와 피해가 있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증오와 보복, 공포와 광기,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의 그림자도 함께 있었다. 그러므로 역사를 신앙으로 읽는다는 것은 내 편의 무죄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스스로 유지하는 야훼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직면하는 일이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세상의 모든 전쟁은 인간이 자기 유익을 위해 지향한 악이 복합적으로 총화 된 결과이다. 당연히 불법적인 선제공격을 감행한 이들의 악은 전쟁의 일차적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방어자들 역시 증오와 보복이라는 보이지 않는 악에 스스로 감염되곤 한다. 악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한편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오늘날 전쟁은 정치적 선택이다. 보이는 것을 토대로 인간 안에 숨어 있던 어둠을 서로 감추면서, 상대의 얼굴 위에 악의 가면을 누가 빨리 씌우는가를 다투는 참혹한 사건이다.
기억하는 자들의 질문과 바카라임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왜 전쟁을 참혹하게 경험하거나 추체험한 이들이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또 다른 유사전쟁의 논리를 쉽게 허용하는가. 전쟁이라는 사건을 일으킨 그 ‘말’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은 이미 주어졌을지 모른다. 이를 위해 기도와 말씀 연구, 증언의 청취, 역사적 자료의 탐구, 삶의 현상에 대한 관찰은 모두 그 베일 앞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왕적, 정치적 바카라무이다.
인간은 자기 앞에 일어나는 사건을 경험할 때마다, 또는 그 증언을 들을 때마다 신의 숨은 의도를 찾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그것을 끝내 다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찾아낸 것을 최종 진리인 양 움켜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오히려 반복되어 일어나는 사건이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자신의 탐구가 끝없이 요구된다는 것과, 그 탐구의 마지막 열쇠를 찾는 것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수용해야 한다.
요컨대, 야훼는 깊은 뜻 가운데 자신을 감추신다. 인간은 떨리는 마음으로 어둠 같은 시대와 기억의 골짜기를 더듬듯 천천히 그 뜻을 찾아야 한다. 오늘 한 사건 앞에서 찾아낸 말이 내일 또 다른 사건 앞에서도 그대로 열쇠가 되리라 장담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그 비밀스러운 의미의 마지막 문은 인간의 손이 아니라, 야훼의 손으로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