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담(閑中談), 언제나 캠핑 일기 첫 문장은...

― 6월의 숲에서 나, 무를 보며

by푸른킴

1. 숲에서 나는 나, 무를 본다

한낮의 무더위가 한창이다. 10분 전 오후 2시, 철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곧 문이 열리고, 간단한 절차를 마친 뒤 정해진 데크에 텐트를 설치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늘 같은 자리다. 데크 옆으로는 오래된 숲이 있고, 앞쪽으로는 먼 산이 내다보인다. 평일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아침저녁으로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늘 같은 일이지만, 속도는 아주 조금씩 익숙해진다. 하지가 지난 직후여서인지 햇살이 뜨겁다. 다행히 간간이 숲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나오길 잘했다고 위로한다. 장마가 오기 전, 햇살이 점점 따가워지는 것도 이 계절의 묘미다. 벌레들은 제철을 만나 활기차고, 해 질 무렵이면 텐트 옆 숲에서 맹꽁이 한 마리가 조용히 찾아왔다가 소리 없이 물러간다. 아마 내일도 올 것이다. ‘자연(自然)’이라는 말이 스스로 일어나는 일들의 터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캠핑은 그런 자연의 실제를 내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오래 걸리지 않아 텐트 설치를 마쳤다. 캠핑 의자에 앉아 숲과 먼 산을 앞에 두고 이른 저녁 식사를 한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여전히 밝은 빛이 남아 있다. 그러다 어느새 어둑한 밤이 치고 들어온다. 한낮에 선명했던 숲의 나무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어둠이 내려앉은 숲 앞에서 나는 언제나 실루엣만으로도 오롯이 서 있는 나무의 자태를 본다. 그 나무 사이에서, 조용히 나, 무를 본다.


밤의 숲 앞에 앉아 있으면, 나무는 단지 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지나온 계절과 시간을 품고 있는 흔적 같다.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숲에서 눈을 떼지 않을 때이다. 바로 그 찰나에 나는 내가 처음 이 숲에 왔을 때를 떠올리고, 이 숲이 지나온 시간을 되돌려본다. 기억할 수 없는 것과 기억되는 것 사이에서 나는 옛 기록을 가볍게 들춰본다. 숲과 나무, 그리고 그 곁을 지나온 나의 시간, 곧 나, 무의 순간이 오롯하다.


2. 나, 무의 흔적들을 만나다

매월 한 차례 캠핑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뒤, 여섯 번의 계절이 왔다. 여름은 캠핑에 적절한 계절은 아니라지만, 다행히 견딜 만하다. 게다가 같은 자리에서 되돌아온 계절을 다시 맞는 기분이란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달랐다.


같은 상황이라는 것은 거의 없다. 이번에도 이른 새벽부터 오전 내내 새들의 지저귐이 요란하다. 겨울을 지나 봄을 거쳐 여름으로 오는 동안, 나무의 잎은 저마다 자기 색으로 달라져 간다.


새들은 해가 뜨기 전부터 아침 해가 가볍게 솟아오르는 것을 응원하듯 박수 같은 울음을 쏟아낸다. 나무도 보이지 않게 자라고 있다. 텐트 바로 앞 산벚나무는 내 손바닥만 한 초록잎으로 완전히 옷을 갈아입었다. 나무 사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생명체들이 저마다의 터를 잡고 있다.


숲에서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수 없다. 낮과 밤이, 밤과 새벽이, 그리고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이 저마다 다른 결로 흐르기 때문이다. 한 번 흘러간 물은 다시 같은 물일 수 없다. 밤을 지난 숲은 아침이 오면 더 싱그러워지고, 아침을 지나 한낮으로 갈수록 바람은 거세지다가 끝내 고요해진다. 숲은 머물다 움직이고, 움직이다 다시 머문다.


숲은 움직이고 변화한다. 미미하고 느릿한 방식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변모한다. 둘째 날 아침, 나는 그 숲 앞 작은 의자에 앉아 오래도록 나무를 본다. 지난밤 어둠이 내렸던 나무들 사이에서 피어났을 고요의 순간을 마주하며, 아침에 나 역시 나, 무를 만난다. 내가 나에게 밤새 평안했는지 묻는다.


3. 정중동의 안식을 누리다

연박을 하는 캠핑장에서는 대체로 같은 패턴으로 시간을 보낸다. 첫째 날은 텐트 설치가 주된 일이고, 셋째 날은 텐트 철수가 전부다. 둘째 날은 안식이다. 캠핑이라는 설치와 해체, 그리고 그 틈에서 나만의 안식을 누린다. 모든 것이 캠핑의 과정이다.


둘째 날은 특히 캠핑장을 떠나야 하는 오전 11시와 새롭게 들어오는 오후 2시 사이, 그 세 시간의 틈이 정중동의 순간이다. 누군가는 자리를 떠나고, 누군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 캠핑장은 잠시 사람의 기척을 덜어내고, 본래의 숨으로 돌아간다. 이제 숲과 나무와 나만 남는다. 우리에게는 있으면서 ‘없는’ 무(無)의 시간이 스며든다.


오늘 이 틈에 평소와 다른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비어버린 캠핑장 주변으로 평소보다 더 많은 까치들이 날아와 떼를 지어 울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숲을 흔들 듯이 거세게 불어온 바람에 텐트가 잠깐 요동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말소리가 물러난 자리에서 새들의 소리가 도드라졌고, 텐트와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은 거칠었다. 마치 숲이 제 안의 말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이런 날은 그 소리들을 가만히 경청하는 것이 가장 좋다.

숲이란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침묵하는 자정의 공간이다. 느닷없이 소리가 난무할 때,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감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자연다운’ 사건이다. 애써 꾸미지 않고, 드러내려 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스스로의 방식으로 충분히 말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잦아드는 일 말이다.


나는 늘 이 세 시간의 여유를 ‘정중동의 안식’이라 부른다. 오늘은 그 이름에 걸맞은 순간을 다시 경험했다. 어쩌면 이 시간 때문에 캠핑장에 머무는지도 모른다. 보이는 것만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들으려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은 가만히 기다리며 보일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캠핑하기는 오래되었지만, 특히 지난 열여섯 달을 통해 더 자세히 배운 것이기도 하다.


햇살이 좋은 아침에는 바카라을 읽으려 한다. 한 페이지도 읽지 않는 날도 있지만, 그래도 바카라은 늘 준비해 온다. 오늘은 두 권이다. 다행히 조금씩 읽었다. 하나는 소설가 이승우의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이고, 다른 하나는 허균의 편지 모음집이다. 바람이 넘겨주는 바카라장을 따라가다 보니, 이 캠핑장의 안식이 마치 소설 속 상상의 장면 같았고, 캠핑장 한가운데 자리한 나무는 오래전 누군가가 내게 보내온 편지 같았다. 읽는다는 일도, 어쩌면 숲 앞에 가만히 앉아 보이지 않는 말들을 기다리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숲에서 보내는 캠핑의 일상은 단순하다. 어둠을 지나 아침을 맞고, 고요를 지나 바람을 듣고, 침묵을 지나 새들의 소리를 만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제와는 다른 나무를 본다. 어제와는 다른 나, 무를 본다.


4. 틈을 지나 숲을 걷는다

캠핑장에서 나만의 안식하는 시간이 지나면, 오후 2시부터는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다. 캠핑장은 어수선해지고 분주해진다.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텐트를 나선다. 정해진 의식을 보내기 위해서다. 하나는 산바카라을 하며 근처 도서관에 들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도서관을 나와 저녁에 먹을 간단한 음식을 사 들고, 멀리 산길을 돌아 다시 텐트로 돌아오는 일이다.


내가 일부러 이 시간에 몸을 움직이는 이유는 텐트 안에 머무는 것만이 캠핑은 아니기 때문이다. 텐트를 벗어나 걷고, 숲 바깥의 길을 지나 다시 숲으로 돌아오는 일 역시 캠핑의 일부다. 어쩌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그 움직임이, 내가 머무는 자리를 더 또렷하게 느끼게 해 주는지도 모른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길을 걸으며, 나는 아침에 읽었던 바카라의 문장들을 곱씹는다. 이승우의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라는 제목과, 허균의 편지 모음집에 실린 “글로는 말을, 말로는 뜻을 다하지 못하네”라는 문장이 내 걸음 속에서 서로 뒤섞인다. 16세기말의 허균은 자기 마음을 편지에 담아 보냈고, 21세기의 이승우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기 뜻을 실어 날랐다.


소설과 편지는 장르로는 서로 다르지만, 자기 속마음을 직접 말하지 않고 어떤 형식 안에 담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닮았다. 소설은 허구의 인물과 사건을 빌려 마음의 진실에 다가간다. 편지는 누군가에게 글을 통해 말을 건네는 형식으로, 평소 미처 다하지 못한 뜻을 전한다. 둘 다 있는 마음을 사실 그대로 옮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새로 마련하는 일, 빈 공간과 여백을 만드는 일에 가깝다.


두 바카라을 함께 떠올리다 보니, 글은 단순히 쓰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승우가 제안하는 바, 소설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나’라는 인물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한 걸음 물러나거나, 다른 목소리 뒤에 숨거나, 심지어 나 아닌 듯한 나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허균의 편지에서는 평소 자신과 다른 자신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려 애쓰는 모습이 엿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춰진 자신이 모두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사실대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다른 결을 얻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소설 속의 나는 허구의 얼굴을 쓰고 나타나고, 편지 속의 나는 수신자를 향한 말투와 침묵 사이에서 여전히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 같은 인생은 누군가 한 번쯤 꿈꿔볼 만한 일이다. 그러나 편지 같은 인생은 누구나 이미 살아본 적이 있는 삶일 것이다. 소설이든 편지이든,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품고 살아간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해 마음속으로 오래 문장을 고르고, 끝내 전하지 못한 말을 자신 안에 접어둔 채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인생은 때로 소설보다 편지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장르가 무엇이든, 글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는 자신이 잠시 사라지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소설가가 글을 쓸 때, 그의 앞에는 이미 소설로 만들어진 숱한 세계가 놓여 있다. 편지를 쓰는 사람 앞에는 그 편지를 받아줄 누군가가 있다. 그들은 모두 거울 같은 존재들이다. 글 쓰는 이는 그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고, 자신의 말을 되묻고, 미처 알지 못했던 마음을 다시 바라본다.


나에게도 그런 거울 같은 존재가 있다. 그것이 숲이다. 숲 앞에 머물면 나는 나무를 보고, 나, 무를 본다. 숲에서 나는 잠시 ‘없는 존재’가 된다. 아니, 이전의 나는 사라지고, 다른 결을 가진 존재로 조금씩 바뀐다. 숲은 나를 비껴서지 않고 자신에게 나를 비춰준다.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나를 낯설게 해 주고, 너무 오래 붙들고 있어서 놓지 못했던 나라면 조용히 내려놓게 한다.


생각해 보면, 캠핑은 나의 거울을 찾아오는 일이다. 정중동의 안식은 바로 그 숲의 거울 앞에 앉는 예식이다. 그 예식을 거치며 나도 나의 글을 만든다. 이 글은 소설도 편지도, 그렇다고 단순한 기록도 아니다. 그저 나를 들여다보는 일기일 뿐이다.


일기란 자기가 자기에게 건네는 편지이며, 소설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남기는 자기 증언이다.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나를 불러내고, 내일의 나에게, 아직 사라지지 않은 내가 언젠가 사라질 나에게 건네는 말이다. 그러니 일기는 작고 조용한 유언 같은 언어인지도 모른다. 숲을 걷고, 나무를 보고, 나, 무를 만나는 동안 나는 그 유언 같은 문장을 조금씩 만들어간다.


5. 숲의 어둠에서 나, 무를 보고 나의 일기를 쓴다

캠핑은 숲 앞에 머무는 일이다. 그 숲에서 나는 언제나 나무를 본다. 밤을 지나 새들이 지저귀는 아침, 싱그러운 나무를 바라보는 일은 즐겁고, 그 나뭇가지에 깃들어 노래하는 새들의 소리를 듣는 일은 행복하다.


낮의 숲은 선명하다. 나무는 제 모습을 완연히 드러내고, 바람은 잎을 흔들며 지나가고, 새들은 저마다의 울음으로 숲의 시간을 깨운다. 밤이 오면 나는 더 이상 숲의 나무를 또렷이 볼 수 없다. 한낮에 나를 감싸고 있던 풍경들이 어둠 속으로 물러나고, 가지와 잎과 줄기의 윤곽도 서서히 사라진다.


숲 앞에 머무는 일은 단지 나무를 보러 가는 일만은 아니다. 나무 앞에서 비로소 사라지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 만남은 대개 낮이 아니라 밤에 일어난다. 보이는 것들이 지워지고, 들리는 것들이 낮아지며, 나를 설명하던 세상의 말들이 흐릿해지는 순간, 비로소 가능해진다.


하루 종일 나를 감싸고 있던 나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마침내 ‘나, 무(無)’를 본다. 여기서 무는 단순히 아무것도 없다는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완고하게 붙들고 있던 이름과 역할, 무수한 생각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순간이다. 나를 채우고 있던 것들이 물러난 뒤에야 드러나는 온전한 빈자리다. 그 찰나와 빈자리는 허무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원(始原)의 공간이다.


나는 그 자리를 온몸으로 감각하기 위해 일기를 쓴다. 내 일기는 하루 동안의 행적을 적어두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사라짐이 남긴 나의 자리를 가만히 더듬어보는 예식이다. 잠시 짬을 내어 숲으로 가보자. 그 숲에 밤이 오면 나무는 사라지고, 그 나무들과 함께 내가 어둠에 잠기는 경험을 해보자.


이번에 보낸 캠핑장의 두 밤은 평소와 달리 거의 인기척이 없었고, 바람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지극한 고요였다. 사람의 소리가 물러난 자리에서 숲은 더 깊어졌고, 나는 그 고요 속에서 정중동의 안식을 누렸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했지만, 그 안에서는 나무와 바람과 어둠, 그리고 내가 조용히 변화하고 있었다.


캠핑의 절정은 바로 이 ‘나의 무(無)’를 만나는 순간이다. 무를 보는 순간, 나는 나의 시작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다. 내가 완전히 사라진 듯한 자리에서 오히려 나의 처음이 희미하게 고개를 든다. 나는 이 순간을 ‘찰기시(察其始)’라 부르고 싶다. 끝난 듯 보이는 일의 저편에서, 그것이 비롯된 처음을 다시 살피는 시간. 사라짐을 지나 새로운 시작의 낌새를 알아차리는 순간이다.


결국 매월 찾아오는 캠핑은 나의 찰기시를 확인하려는 의식이 되고 있다. 계절이 달라질수록 삶의 날들은 끝을 향해 밀려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느릿하게 걷고 싶지만, 바람처럼 내달릴 수밖에 없는 날들도 있다. 해야 할 일들은 나를 앞질러 가고, 마음은 그 뒤를 따라가느라 자주 숨이 찬다.


그런 날들일수록 나는 자연답게 생각하고 싶다. 자연답게 생각한다는 것은 서두르지 않되 멈추지 않는 일이며, ‘주어진 길’을 붙들되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저 나무처럼, 스스로 자기 처음으로 되돌아가려는 숭고한 수고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숲의 나무들은 기꺼이 모든 잎을 떨구고 다시 처음의 빈 몸으로 돌아갈 것이다. 소멸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맞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의식에 기꺼이 자기를 맡길 것이다. 새들도 언젠가는 자기 울음을 거두고 고요 속으로 침잠할 것이다. 침묵은 소음의 반대가 아니라, 다른 울음을 준비하는 보이지 않는 깊은 도약의 시간이다. 숲은 그렇게 절정에서 비움을 배우고, 비움 속에서 다시 시작을 준비한다. 여름에 겨울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6월의 캠핑은 계절의 절정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찰기시의 지혜를 얻는 시간이다. 정중동의 안식을 경험하는 순례이다.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안으로는 깊이 움직이는 안식,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하지만 자기 처음을 향해 조용히 되돌아가는 안식이다. 나무를 보며 나, 무를 떠올리는 안식, 숲의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나를 감각하고 다시 시작되는 나를 기다리는 안식이다.


나는 그 안식을 나의 일기에 담아둔다. 내 일기의 첫 문장은 글로 쓰지 않아도 언제나 “이 계절에도 그대는 평안한가?”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안부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물음이다. 6월의 이 안부는 어쩌면 “이 여름에도 그대의 겨울은 안녕한가.”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숲의 어둠 속에서 나무를 보면서 나, 무를 만난 뒤에야 나는 이 물음을 비로소 다정하게 나를 위해 다시 쓸 수 있다.


나무를 본다는 것은 결국 나, 무를 보는 일이다. 나의 무를 본다는 것은 사라지는 나의 자리를 감각하는 일이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그 사라짐 속에서 다시 처음을 만나는 일이다.


6월의 캠핑을 마치다.

밤하늘이 맑다.


*찰기시(察其始)는 『장자』 「지락」 편에 보이는 말이다. 여기서는 사라짐과 끝의 자리에서 다시 그 처음을 살핀다는 뜻으로 빌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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